정조임금의 발자취를 찾아서 -화성행궁과 혜경궁 홍씨

2014. 1. 14. 19:30사진쟁이 길을 나서다[저작권]

 

지난 연말에 막을내린 국립극단의 연극 `혜경궁 홍씨` 는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긴장감이 흐른다..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성대한 진찬례[회갑연]을 준비한 정조임금은
 외척을 배척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말하는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충돌한다 
  "외갓집의 맺힌 한은 어찌할 것이오?"라고 혜경궁 홍씨가 묻는다.
그러나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실 때 두 분[외조부 홍봉한과 어머니]은 왜 모두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까?.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라며 오히려 어미의 잘못을 따진다.
즉위하자마자 외가를 몰아낸 정조의 마음은 차갑다.
이 회갑연도 단순한 잔치가 아니었다. 죽은 아버지의 복권을 연출하는 무대였다.
정치 반대편에 서 있는 친정과 아들 사이에서 평생 고통스러웠던 혜경궁 홍씨.
 모정으로 아들을 끌어안아야 하는 여인의 한숨이 객석에 깊이 박혀 있었다
10살때 세자빈으로 들어와 궁에서 동갑내기 남편 사도세자를 만난  순수했던 어린시절 그리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어 점점 미쳐서 변해가는  남편 사도세자를 지켜봐야 했으며
정쟁에 휩싸인채 영조에 의해 아들이 보는 앞에서 뒤주에서 죽어가는 남편 바라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는
현제 이시간에도 우리들은 방송에서 드라마로 보고있다 ..

 

 

화성행궁은 수원화성으로 둘러쌓인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이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양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행궁은  평소에는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곳으로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며, 성곽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행궁터는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한국의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으로,
 1796년(조선 정조 20년)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사도세자]의 능침인 화산릉[지금의 융건릉 자리]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자주 쉬어갔다.

 


 당시에는 봉수당과 경룡관 ,복내당,·유여택,·노래당,·신풍루,·남북군영,·집사청·서사청·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만 남게 되었다.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인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경의왕후)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 양식의 팔작지붕집인데,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이어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인 화령전이 재건되었다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년(정조 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였다.
그 후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 200명이 살면서 지키는 건물이다. 남군영은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보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 13년)에 처음 지어졌고, 1794년에 증축되었다.
북군영
북군영 역시 남군영과 마찬가지로 친군위의 기마병이 숙위하는 건물이다. 북군영 역시 1789년에 지어졌고, 1794년에 증축되었다.
서리청
서리청은 서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서리란,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해 있다.
비장청
비장청은 화성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세워졌는데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집사청
집사청은 국왕이 쓰는 문방사우를 보관하고, 비품을 관리하는 것과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1789년에 세워졌다.
좌익문
좌익문은 신풍루를 통과하여 마당을 지나면 나오는 문으로 중양문 앞에 위치해 있다. 1790년에 완공되었고, 남쪽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외정리소
외정리소는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당시에 행사를 준비하던 임시 기관이었다. 정조의 행차가 끝난 후 외정리소라 명명하고 임금이 행차하실 때의 행사를 준비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의 정리소는 장용영 내영에 있었는데 1796년에 행궁이 완성되면서 현재의 위치가 되었다.
중앙문
중양문은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앞에 있는 문이다. 1790년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고 좌우로 행각을 두었다.
봉수당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완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그 후 1997년에 복원되었다.
유여택
유여택은 평소에 화성유수가 기거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건물이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년)에 건립되어 은약헌이라 하였다가 1796년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명칭을 가졌다.
경룡관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 사용했던 부속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