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7부) 팔색조가 우는사연
거제도( 1986년~1998년 ) 에서 쓴 일기장 중에서
제 6부 팔색조가 우는 사연
박영준 등대장이 거제도 저구리 포구에서 고아가 된 동숙을 포대기에 싸서
서이말 등대로 오던 날 돌쇠영감 내외는 등대에서 나오는 산등성이 오솔길 따라
지금의 예구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박 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거제도 해금강을 거치는 해안도로는 비포장길이었으며 교통편도 자주 없었다 .
저구리 포구에서 걸어서 산등성이를 넘어 다대만으로 그리고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일운면 망치 마을을 지나 구조라항 포구까지 와서 잠시 머물렀다.
''등대장님 딸입니까 ?.'' 동네 사람들이 포대기에 싼 동숙을 바라보면서 몰려 들었다.
'' 저구리에서 업동이를 안고 왔습니다. ''
평소 안면이 있던 동네 사람들에게 일부러 동숙을 보여 주었다.
그래야 젖동냥 이라도 얻을 수 있으니까
우는 동숙을 젖동냥을 해서 잠재우고 그리고 걸어서
지금의 와현리 해수욕장을 지나 예구마을 까지 왔다고 한다.
셋이서 산길을 따라 등대로올라 오는 동백나무 숲길에서 동숙이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돌쇠 할멈이 나오지 않는 젖도 물려보고 달래기도 했지만 어린동숙의 울음소리는 멈추질 않았다고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팔색조 한쌍이 서이말 등대 까지 쫒아 왔다고 하는데
그후에도 등대 수천년 된 후박나무 숲에서는 팔색조의 슬픈 울음소리가 자주 들리곤 했다.
거제도의 팔색조는 구조라 포구에서 망치 와 학동 포구를 거쳐 해금강에 이르는 해변가
후박나무 숲과 동백숲에서 서식을 했는데 조용하고 불빛이 없는 곳에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숨어서 지내는 습성이 있다 천적 으로 부터 둥지를 보호하기 위해 고라니 등 동물의
배설물을 물고와 분해시켜 둥지 아래에 뿌려 놓는 영리한 새이다 .
그러나 거제도 해안 일주도로가 생기면서 후박나무 숲과 동백나무 숲을 베어 버려
번식지와 날라 다니는 통로를 잃어 버리고 지나가는 차량 불빛과 소음 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팔색조의 아름다운 새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자연의 섭리조차 어겨버려 훗날
하늘로 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는것이 아니였는지..
동숙이 포대기에 쌓인채로 등대 돌쇠영감 집으로 온 후에도 동숙은 어렵게 컸다고 한다.
우유도 귀하던 시절 우유 대신 밥솥에 밥을 할때 뜸 드릴때 나오는 그 뜸물을 받아 먹이며
그렇게 동숙을 키웠다고 하며 그 시절 서이말에는 전투경찰 부대가 상주 해 있었는데
전경 부대에서 전경들이 가끔식 나눠주는 과자봉지가 동숙과 현석의 유일한 간식거리 였다고 한다
등대 박소장이 동숙이 커가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동숙이 두어살이 되었을 무렵 김 소장 의 둘째 아들 현석이 태어 났는데 동숙과 현석은
어린시절 부터 오누이 처럼 자랐다
부친 김소장이 다른 등대로 근무처를 옮겨도 현석의 조부(1대 등대지기)와 조모가 등대에서
현석을 키웠다고 한다
그후 몸이 약한 현석의 친모는 서이말 등대에서 태풍이 몰아 치던날 산고를 겪다가
여건상 병원도 못가보고 숨지고 말았다.
서이말 등대앞 해상은 늘 태풍이 다가오는 길목에 위치 하고 있다.
해발 (바다 표고)는 100 미터 남짓한데 태풍때 해일이 몰아 치면 등대 까지 파돗물이 올라온다
태풍이 지날때면 서이말 사람들은 모질게 불어대는 바람에 날려 쳐박히지 않기위해
이동할때 바위돌을 하나씩 들고 다녀야 한다 태풍예보가 있으면 문앞에 20킬로짜리 바윗돌을 준비한다
1987년 태풍 셀마때 일이였다 태풍이 지나고 난 아침날 등대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길 470여개중 절반이 잘려나가고 간이 창고 도 사라져 버리고
모든건물 지붕 이라고는 다 날라 가버리고 없었다.
해일이 한번 몰아쳐 바닷물의 염분을 뒤집어 쓰고 나면 그렇게도 강한 동백나무 잎을 비롯해
모든 나무와 식물은 다죽어 버리는데도 유독 후박나무만은 그래도 살아 남는다.
후박나무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거제도 와 통여 비진도에서만 자라는
토종 후박나무는 발아율은 동백나무 보다 훨씬 좋지만 옮겨 심으면 동백나무는 잘 자라도
후박나무는 금방 죽어 버린다 옮겨심은 후박나무는 잎은 멀쩡해서 살아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벌써 죽어 살아 있는게 아니다
캐어낸 그자리 그토양에 다시 옮겨 심어도 곧바로 죽어 버리는 습성이 있는 요상한 나무이다
동백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서도 동백나무는 아름다은 꽃이라도 피우지만
후박나무는 아름다운 꽃도 피질 않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바다와
시커먼 후박나무 숲을 한참을 바라보면 무서워 진다.
칠흑같은 컴컴한 바다색은 어떠할까? 자세히 보면 컴컴한 바다는 수은 성분 때문에
형광 물질의 은빛 야광이 난다 그 은빛 과 후박나무숲 그림자와 어울리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으시시 하다.
나는 지금도 종교와는 무관한 사람 이지만 그당시는 토속 신앙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 했었다
서이말 등대의 무릉 바위의 내력과 등대에서 마을로 가는 옛 숲길 아래로 무너져 내린
옛성터의 이끼낀 오래된 칼돌들 그리고 어느 종교 창시자가 이곳 성터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터의 샘물을 마시고 떠났다는 오래된 돌담집의 흔적들
그리고 박소장이 나에게 들려줬던 오래전 등대의 내력과 무속 신앙이 흥흥했던 인근 마을
지세포리와 예구, 와현리 의 그렇게 많던 무속인 집들의 깃발들
등대 돌쇠 할멈집에 자주 찾아오던 지세포리 무속인 선재 할멈,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된 동숙을 서이말 등대로 가는길에서 처음 마주 쳤는데
무속인 선재할멈의 막내 딸 과 그녀를 언니 라고 부르며 따라 다니는
동숙의 이상한 행동 그리고 오래전 종교 창시자가 이곳 해상을 을 건너 왔다면서
지금의 모 종교 방송이 개국 기념방송 을 내보내기 위해 이곳 해상을 촬영 하기 위해
통재 구역인 이곳 을 한달 내내 숨어 지내던 사람들 실제로 그 개국방송은 2개월 내내
이곳을 포함한배경 방송만 내보었지만 왜 이곳을 찍어 갔는지 설명은 없었다.
내가 청송 신촌 초등학교 다닐 때 은사님의 모친의 택호가 남 모댁(실제이름) 으로 불러진
무속인 있었다 나의 조모가 자주 점을 보러 다니고 굿하는 집을 찾아 다닐때
조모의 무릎을 베고 굿을 하던 모습을 바라보던 모습을 자주 떠올리곤 했는데
그 은사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아도 은사의 모친의 이름이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나는 영적인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 보다 우수한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이곳 서이말로 오게 되었는가 ?
나도 종교 창시자 흉내를 내볼까. ?
당시에는 별생각을 다 했었다.
거제도 토종 후박나무
제 7부 동숙의 노래
동숙이 현석보다 두어살 위 였지만 마을로 나가는 등대 산길 10여리 먼길을 걸어 다니면서
일운면 에 위치한 초등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하고 지세포 중학교를 함께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동숙의 친삼촌이란 사람이 나타나 천지 풍파를 일으키고 말았다.
''지금와서 그애는 찾아서 뭘 어쩔려고 .''박소장이 대단히 노해서 다그쳤다.
''형님 핏줄이니 찾아야 하지 않겠소." 낮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그가 말했다.
''형님핏줄 ?.''
''형님내외가 죽었는데도 와보지도 않고 젖먹이 일때는 쳐다 보지도 않다가 이제와서
핏줄을 찾겠다고?.''
돌쇠영감 내외는 서이말 등대 산에서 나는 약초를 캐서 말린거와
해산물 그리고 산나물을 뜯은것을 모아 두 내외가 등짐을지고 먼장터 까지 걸어서
그것을 내다 팔곤 했는데 동안 모아논 돈도 꽤 있었다고한다.
''당신 무슨 영문에서 찾아 왓는지는 모르지만 한번만 더 찾아오면 가만 두지 않겠소.''
하지만 삼촌이란 사람은 자주 등대로 나타나 돌쇠영감 내외를 괴롭혔는데
그바람에 더이상 동숙은 중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서이말을 떠나게 되는데
그 충격을 고스라니 현석도 받았다고 한다. 세상 지리에 익숙치 못한 동숙이
찾아 갈곳이라곤 지세포 무속인 선재할멈의 막내 딸이 머물고 있는
부산 감천동 달동네 였다고 한다 선재 할멈 막내딸은 동숙보다 나이가 몇살 위였고
지세포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에 가 있었는데
얼굴이 미인이라고 지세포리 마을에서도 소문이 자자 했다고 한다.
그당시에 선재 할멈 막내 딸은 무속인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파란한
삶을 살다가 결국 신내림 받고 무속인이 되었다.
대부분 여자 무속인들은 얼굴들이 잘생겼다고 한다 늘 진한 분장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아온 무속인이나 TV 방송에 나오는 무속인들은 다 잘생긴게 사실이다.
그들만의 뭔가 특별한 뭔가가 있는모양이다 그후 현석은 지세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으로 나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소식이 끊어진 동숙을 찾기위해 부산바닥을 거의
해집고 다녔지만 결국 찾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으로 부산 완월동 에서 보았다고 하는사람도 있고 ,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고 하는이도 있었다고한다.
서이말 등대에서 가까운 마을인 지세포리에 등대지기 1대인 현석의 조부가 등대원 을 퇴직하고
말년에 현석의 조모와 살고 있었는데 노환에 치매까지 앓고 있었다 .
현석이 부친 김소장과 자주 왕래를 했는데 효자라고 마을에서 소문이 난 집안 이였다.
현석의 조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아흔을 넘긴 연세에도 정정하여
서이말 등대 야산으로 선재할멈과 약초를 캐러 다니기도 했다.
손자 현석이 3대를 이어 등대원이 되는걸 처음에는 반대를 했다고 하나 천직을 어쩔수 없었는지
후에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고 한다 며느리까지 등대에서 자신보다 먼저 여의게 했고 어린날을
등대에서 외롭게 보낸 현석을 또다시 대를 이어 등대지기를 할수는 없게 하였스리라 생각된다.
지세포리 는 거제도의 작은 항포구로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옛스러움은 많이
잃어 버렸지만 당시에는 전형적인 시골 바닷가 마을이였다 돌담집이 많았었고 해녀도 많은 동네였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칠순을 넘긴 해녀 들이 많았다.
당시 연세가 많은 할머니 들이 많았다 한집에 두 서넛이 형님동생 하면서 같이 살고 있었는데
영감이 먼저죽고 그 영감 후처 할머니 (소실)들이 정답게 한집에서 말년을 보내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도 했지만 훗날 이해가 되었다 .
예전에는 바다 마을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어 소실로 들어와도 큰 흉이 안되는 것이었다
바다를 생계수단으로 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 먹고 살기위해 바다로 고기잡이
나갔지만 거센 풍랑에 남자들이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거제도는 다른 섬보다 많았다고 한다.
무속인 선재할멈은 셋째 소실로 들어 왔는데 그래서 그집 형제들이 11명이나 된다고 하며
막내딸 은숙만이 훗날 전통 내림 굿을 전수 받았다고한다.
조선 땅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섬이지만 70년대 거제대교가 생기 전에는 섬 이었고
뭍에서 유배나 오는 곳이며 포로 수용소등 사연도 많은 섬이며
지형 여건상 바람도 심하게 불고 해상의 파고도 늘 높이 친다.
바다에 나가 목숨을 잃어버린 망자의 이름을 딴 마을 이름도 많았는데 지금은
좋은 뜻으로 바꿔 버렸지만 망치 ,망산 둔덕리 매물도 등의 이름은 어찌하였든 간에
예전에는 망자와 연관시켜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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