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소설[후박나무 전설]

후박나무 전설( 13, 14 ,15부)/돌아오지 않는 동박새外

청솔아트 2010. 7. 14. 22:12

              

          거제도( 1986년~1998년 ) 에서 쓴 일기장 중에서

 

 

                     제13부  서이말 성터의 비밀

  

 거제도 서이말 등대에 가을이 오고 있었다

 등대에 이르는 비포장 길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던 빨간 자귀 나무꽃이 지고

  동백숲을 들낙이던 동박새도 멀리 떠나고 나면  바다건너  태풍이 올라온다

  멀리 대마도가 가장 가까이 보이는 서이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태풍을 먼저 받는 길목에 있다

  그 무서운 태풍도 지나고난 후 가을 해무가 거제도 지세포 항에도 밤새 자욱히 내려앉아 있었다.

 새벽에  개짓는 소리에 잠을 설치고

 이른아침 출근을 준비 하고 집을 나서는데

대문앞에 돌쇠할멈 수양딸 동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지나가고

‘’ 밤세워 여기서  기다렸나요?.‘’

대답이 없었다  등대로 가기위해 새벽 부터 기다린 모양 이였다.

‘’차에 타시오 .‘’

내가 동숙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울기만 하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울기만 하던 그여인

거제도의꽃 동백꽃말이 청순가련 인데

많은 세월이 흐르고 다시 만난후  말없이 사라져 갈때도 그모습이였지만 ..

지세포리에서 서이말에  이르는 10여리 비포장길은  며칠전 태풍때 내린 폭우로  쓸려가 온통  바위길이 되어 있었다

삼거리 쉼터인 후박나무 숲길을 지날때 까지도 한동안 둘은 아무말이 없었다.

‘’현석을 만나 보았나요?.'' 내가 먼저 물어 보았다.

동숙은 차 속 뒷 좌석에서 ‘’네‘’ 하고 작은소리로 답했다 .

통영 사량도에서 풍어제를 겸하여 내림굿을 전수받은 동숙,

이 가련하고 청순해 보이는 여인이 무속인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를 않았다.

거제도 저구리만에서 젖먹이때 부모를 잃은 동숙을 포대기에 싸서 

 서이말 등대로 대리고 온사람이  박영준 등대장이였다.

당시 해금강(갈곳도)해안로는 비포장 험한 길이였다.  

차편도 잘 없던시절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타고 와현 마을에서 부터는 걸어서

서이말 등대까지 오는 먼길에 우는 동숙을 젓동냥을 해가면서 돌쇠영감 내외에게 수양 딸로 맺어준

등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와현,예구 공고지를 지나 등대로 오르는 후박나무 숲길에

 팔색조 한쌍이  슬피 울면서 등대안까지 따라 왔다고 했었지 ....

동숙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더 이상 물어 볼수가 없었다.

  돌쇠 할멈(실제이름)이 해초를 뜯으러간 남편 돌쇠 영감을 서이말등대 후막나무숲아래

무릉바위 바닷가에서 황천길로 보내고 시름시름 앓다가 기력이 다하자

등대 관사옆 오두막집에서 기거를 하고 있던 돌쇠할멈을 등대장 박소장이

당시 거제군청에 협조를 받아 사회복지 요양시설로 옮겼으나  그곳에서 오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살아왔던  바닷가에 서 개발을 하고 등대산에서 약초를 케면서 평생을 살아온 그곳 등대에서 죽겠다고

다시 서이말 등대 옆 오두막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할머니 좀 어떠세요?.‘’

 나는 동숙을 등대에 내려주고 잠시 돌쇠할멈이 기거를 하는  오두막집에 들러 보았는데

뼈만 앙상이 남은 모습에 가뿐 숨을 몰아 쉬면서도 내얼굴이 비쳐지자 문밖을 나올려고 하고 있었다.

‘’누워 계세요 .‘’

‘’돌아 갈 때 등대직원 에게 예기 하세요 태워 드릴테니. ‘’

동숙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  부대안으로 급히 들어 갔다.

당시 서이말 등대(지금은 항로 표지관리소)에는 진해 가덕도 등대에서 부임해온 이소장이

등대 직원 3명과 근무를 하고 있었고 등대지기 3대를 이어가는 현석은 진해 가덕도 등대에 순환근무를 가 있었다.

현석의 아버지는 통영 매몰도등대 소장으로 근무를 하고있었는데

가덕도 등대에 근무하던 현석은 가덕도 등대가 얼마후 부산 지방 항만청 관할로 이관 되어

태종대등대, 오륙도 등대를 오가면서 순환근무를 하게 되면서 서이말 등대에는 근무를 하지 않게 된다 .

그리고 박영준 등대소장은 정년 퇴임을 앞두고 마산 항만청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통영 홍도등대는 그때부터 무인화 등대가 되면서 서이말 등대에서 원격 조종 운영 하게 된다.

그리고 등지기 3대를 이어가는 현석은 가덕도 등대가 부산지방 항만청 관할로 넘어 가면서  서이말등대 에서는  

더이상 등대원 근무를 하지 않게 된다.

오랫동안 전설의 등대가 있는 서이말 사람들과 함께 해온 등대....

돌아오지않는 등대로 떠난 등대지기들 ,

 황천길로 간 돌쇠 영감 과 무속인이 되어 영영 떠나는 동숙의 이별,

박영준 등대장의 정년퇴임과  얼마 남지않은  돌쇠 할멈의 운명이

나로 하여금 서이말  성터의 내력과  마르지 않는 샘터의 비밀등 

전설의 서이말 등대의 역사들이 영영 묻혀 지고   잃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초조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

 



                                                                                                                거제시 남부면 저구항

      

           제 14부 개나리 봇짐 진  등대지기 

 

등대(지금은 항로표지 관리소)에서 등대원은 3명이 근무를 한다.

 등대지기 3명중 1명이 돌아가며 본가가 있는 내륙으로 나간다.

 휴가를 마치고 등대로 돌아올 때는 보통 한달여 등대에서 먹을 양식과 부식을 준비 해오는데

 가족이 있는 본가가 있는 곳까지 오고가고 하는 번거러움의 고생이 말이 아니다 .

지금은 섬이 아닌 내륙으로 연결된 등대는  도로가 새로 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등대원들이 가족을 뵈러가는 그마음을 옆에서 지켜 보노라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박영준 소장이 통영 소매물도 등대에 근무를 하고 있을때 본가가 있는 마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꼬박 하루가 걸리고 어떤 때는 이틀이 걸리고  바다 기상이 나쁘면

기상이 호전 될 때 까지 집에가는 것을 포기 해야한다.

통영 매물도는 등대가 있는 소매물도와 민가가 있는 큰매물도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져있는데 

매일 변하는 썰물때 하루에 두번  바닷길이 열려   큰섬 으로 나간후 배가 닿는 부두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루 한두번 통영항으로 나가는 여객선을 타게 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등대원들은 뭍으로 나갈 때는 거제도 저구리 작은 항구로 들어와 거제대교를 타고 육지로 나간다.

소매물도 에서 보면 가까운 거리에 거제도 저구리만이 있는데 정기 여객선을 다니지않고

저구리 항포구에서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1톤정도의 작은 어선인 통통배를 이용한다.

그래서 평소 등대원들과 이들 바닷 사람들은 유대관계가 돈독할수 밖에 없다.

돌쇠 할멈 수양딸 동숙이 바로 저구리만에서 작은 어선으로 고기잡이 하던 선장의 딸인데

동숙이 젖먹이때 그녀의 아버지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그만 황천길로 가고 그녀의 어머니 마저

그 충격에 숨을 거두자 오갈 때 없는 어린 동숙을  박영준 등대장이 거제도 서이말 등대 옆 오두막집에서

등대일도 도와주고 바닷일, 등대산에서 약초를 캐서 생활을 해오던 돌쇠영감 내외의 수양딸로 맺어준 것이다.

소매물도에서 작은 통통배를 얻어타고 저구리만에 도착한 박소장은 저구리만 항포구에서

 안면이 있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보고 마침 때거리를 하는집에 들러

   ‘’밥한술 주이소 !‘’      

  ‘’집에 가본지가 오래되어 반찬이 떨어져 아침도 굶고 섬에서 나왔소‘’

그러면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 처지라 주저없이 숟가락을 언져준다

저구리에서 버스정류장이이있는 거제군 고현리 까지 나가는것도 보통문제가 아니다.

당시 거제도 해안일주 도로를 내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 였는데

  해안 일주도로는 장승포 해변에서부터 지세포, 망치 , 학동(몽돌해변)을 지나 대포항 에서 

 저구리만으로 넘어가고 좌측 은해안로 여차 항포구로 넘어가는 길이다.

 해안도로가 나기 전에는 작은 절벽이 있는 해안가에는 동백나무 숲과 후박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겨울이 가기 전부터 동백꽃이 피고 아름다운 동박새 노래소리, 팔색조 지저귀 소리가 들렸는데

이 해안도로가 생기고난 후부터는 차량 소음과 불빛에

보금자리를 잃고 팔색조와 동박새는 더 이상 거제도에는 찾아오지 않고 있다.

해안도로가 나기전 에도 사람들이 다니는 소로길은 있었다 .

 

젊은 시절 박소장은 땀에 젖으면 갈아 입을 옷을 담은 개나리 봇짐을 지고 이길을 걸어서

거제도 동부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거제도 도장포만에 있는 학동 몽돌밭과 해금강 (갈곳도)이 유명해 지면서

해안도로가 뚤리고 박소장은  대포항을 걸어 넘어 오면서 부터는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올수가 있었다

박소장이 지나 오는길에서 학동포구 ,망치 항포구를 지나 구조라항포구에서는 꼭 쉬어가는데

운이 좋아 고기잡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친분이 있는 통통배 선장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생선회한접시와 소주 한잔 얻어 먹을수가 있었다고한다.

''등대장님 잘다녀 오세요.‘’

‘’고맙습니다 잘먹고 갑니다. ‘’

그시절 인심이 좋았던 항포구 사람들은 늘 그렇게 반겨 주고 배웅해 주었다.

젖먹이 동숙을 포대기에서 싸서 올때도 구조라마을  아낙들이 먼저 젖을 물려주고

쌀뜸물을 끓여 먹여 주었던 곳이 바로 이곳 구조라 항포구였다 .

와현,지세포를 지나 장승포 버스정류장에 다다르면 늘 해가 서산에 걸리는데

마산 본가에는 늘 밤늦게 도착하지만 맘씨 좋은 등대장 부인은 저녘밥도 안먹고 기다린다고 했다.

 

                                       

    15부 돌아오지 않는 동박새

 

등대지기 3대를 이어가는 현석은  정월 대보름날 풍어제가 열린 통영 사량도에서 

동숙이  정식으로 무속인인 되는 절차인 신내림 굿을 하고

무속 세상의 길로 걸어가는 것을 확인한 현석의 마음은 착찹했다. 

사량도 에서 돌아와  근무지인 진해 가덕도 등대로 향하는 그의 머리 속에는

동숙과 함께 했던 지난날  회상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생모의 얼굴도모르고 자란 현석과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돌쇠 영감내외의 수양딸이 되어  

 어린시절  서이말 등대에서 오누이처럼 커가면서 써내려간 동백꽃 일기 들을 하나씩  지워야만 했다. 

 비록 동숙이 두 살 위기 하지만 현석이 어른이 되어 가면서

  서로 연인의 정마저 느껴 장래까지 맹세한 사이 였지만 

  이젠 동백숲을 떠난  동박새처럼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

서이말 등대에서 오누이 정을 맺어 주려고 박영준 등대장이 기념으로 서이말 등대 등탑 앞에 심어준

동백나무와 팔손이 나무는 그대로 서 있는데  봄날 동백꽃속에 에 달린 꿀을 배가 부르도록 따먹던

그 동백나무도 이제는 어른이 손을 뻣어도 못다을 만큼 컸는데.. ..

‘’ 가덕에 갈려면 빨리 타시오.‘’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현석이 가덕에 들어 가는 작은 여객선이  부두로 접안 하는 줄도 몰랐다

그시절 가덕도에 들어 갈려면 진해 웅천항에서 배를 타고 가덕도 천가동 항포구를 지나

대항마을에 내린후  1시간여 등대산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등대가 나온다 .

''  등대장 아들 현석이 온다 ''

 작은 항포구 대항 마을  노인네들이 배가  접안 부두로 들어 오고

 현석이 배 위에서 손을 흔드는것을 보고 큰소리로  외쳐댄다.

가덕도 대항 마을에서 그가 김형진 등대장의 아들인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현석의 생모가 태풍이 몰아 치던날 서이말등대 숙소에서 현석을 낳다가 숨을  거두었는데

그후 김소장이 거덕도 등대에서 2년간  순환 근무시 대항 마을에 어린 현석을 자주 데리고 왔는데

그래서 가덕도 대항 마을 사람들은 현석에게 정이 더하다.

현석이 어린서절 혼자 바닷가에서 혼자 놀다가 바다에 빠져 마을 사람들이 구해준 일도 있다.

그런 현석이 이제는 가덕도 바다의 길잡이 등대지기가 되었으니

 마을 사람들도 늘  그를 반갑게   맞이 해준다 .

예전 가덕도에는 숭어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고 숭어를 잡는 형태도 유명하지만

 현석 아버지 김형진 등대장이 대나무 장대로 숭어를 잡는 기술은

오랜 뱃일을 한 뱃사람들도  그의 숭어잡는 기술은  따라 오지 못했다.

지금도 가덕도 대항마을에 가면 세월이 흘렀지만 김형진 등대장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당시 대나무로 숭어를 잡아 올리면  동네 어린애들로 부터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숭어를 한쿠러미씩

들려 보냈는데 이는 그의 어린 아들 현석을 위함 일지도 모른다.  

대항마을에서 가덕도 등대에 이르는 산길 능선은 임진왜란때 유명한 격전지 였는데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수군의 요충지 여서 그런지

임진왜란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었는데 지금도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가덕도 등대가 부산 지방 항만청으로 소관 관할청이 바뀌어

 현석이 거제도 서이말 등대에는  근무를 하지 않게 되는데

어쩌면 동숙과 유년의 시절 써내려간  동백꽃일기를

 하나씩   지워 버리고 동숙을 잊어 버릴수 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