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떠난 생모의 기구한 운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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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1986년~1999년)에서 쓴 일기장 중에서/
버리고 떠난 생모의 기구한 운명의 삶 /
1997년 여름
거제도 여름날 바닷가는 전국에서 모여든 피서객들로 붐빈다.
서이말 등대산과 등대로 오는 길 공고지 해안가 야산에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주는 자귀나무 꽃이 피어 온통 하얀색과 분홍빛의 세상이 된다.
겨울에도 동백 숲과 후박나무숲은 언제나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서이말 등대로 가는 길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
세상 사람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아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숲이 원시림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거제도 서이말 등대(항로표지 관리소)에서
오래도록 등대를 지키던 박 소장을 비롯해서
등대사람들도 이른 정년을 맞아 하나 둘씩 떠나가고
등대 3대를 이어가던 현석도 부산권 항만청 소속 등대로 발령을 받아서
다시는 서이말 등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
돌쇠 할멈도 세상을 떠나고
기구한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돌쇠 할멈의 수양딸 동숙의 소식도 없었다 .
나 역시 1997년 여름날 등대 아래 바닷가 선창 느렁바위 ,
돌쇠 영감이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병사를 일어 버리는 사고를 당하고
커다란 슬픔에 잠겨 있었다 .
나 또한 마음의 한구석에는 서이말을 떠나야 한다는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익사사고 있었던 그날 외동 아들을 잃어버리고 서울에서 달려와서
절규를 하던 그의 아버지의 울부짖는 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
"멀리서 와서 죽었네"
지금도 서이말 등대 아래 바닷가 느렁바위에는 그 병사의 추모비가 있다.
1997년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여름날 거제도를 찾아오던 피서객들도 사라지고
서이말 등대와 등대 아래 느렁바위 바위섬을 구경 오던 사람도.
없었다 .
등대산에 후박나무를 베어내고 헬기장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나는 헬기장 공사와 경계 임무시 시야 확보를 위해 사계청소를 하는 과정에서
후박나무를 베어 내는 것에 반대를 했으나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고목이된 후박나무를 내손으로 베어버리고
얼마후 바다에 부하를 잃어버리는 사고를 당했다.
후박나무 숲을 없애 버리고 헬기장을 완공하고부터
샘터의 물도 말라버렸다 .
검은 칼돌로 쌓여 있던 옛 성터자리 샘터 물줄기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내가 이곳에 부임을 해온 후 12년여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흘러서 등대 사람들과
부대원들의 식수로 사용을 하였는데
서이말 등대에서 바라보는 내도 섬
부대 위병소와 떨어져 있는 헬기장에 민간인이 있다는 근무 초병의 연락을 받고
헬기장으로 가보았다.
요새처럼 위치해 있는 서이말은 등대 건물이 있고
등대산 아래 헬기장이 차례로 놓여있다 .
헬기장을 통해서 등대 후문으로 가는 길이 있다.
내가 헬기장에 갔을 때는 그 여인은 등대 후문 쪽문을 열고 등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등대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사람은 등대 후문 쪽문을 열고 쉽게 등대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
어느 정도 등대 사정을 아는 사람의 방문인것이다 .
당시 등대 직원은 새로 부임을 해 왔는데
점차 원격제어 무인등대화 하는 과정이라 근무 인원도 줄고 해서
통신 교신시간 외에는 등대안에서 움직임이 거의 없다 .
"어떻게 오셨나요?"
내가 물어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나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
어디서 보던 얼굴 같기도 하였다.
동숙의 얼굴을 많이 닮았다 .
순간 전에 등대 박 소장이 나한테 전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저구리에서 젖먹이 동숙을 버리고 간 동숙의 생모?
통통배를 타고 먼 바다에 조업을 나갔던 남편이 풍랑을 맞아 세상을 떠난 후
젖먹이 동숙을 버리고 떠나간 여자
그런 동숙을 포대기로 싸서 이곳 등대 돌쇠 영감 내외에게 건네 주었던
박 소장도 정년퇴직을 하고
함께 동숙을 돌보던 현석의 부친 김 소장도 소매물도 등대에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고
과거 돌쇠 할멈과 함께하던 직원들도 서이말 등대를 떠나고 없는데
이제 와서 서이말 등대에는 왜 찾아왔을까?
돌쇠 할멈의 죽음을 알고도
동숙이 서이말 등대에 오지않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곳이 통제구역이라 출입 목적을 말해야 됩니다 "
내가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등대 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자
"뭔 일이래요"
얼마전 소매물도 순환근무를 마치고 서이말등대로 온
등대 직원 이주사가 숙소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다.
"이분들 아세요?"
내가 이주사에게 물어보았다 .
잠시후
등대 사무실이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던 이주사의 얼굴이 얼어붙어 버렸다 .
지세포항 우측 산 아래 적색 지붕 필자가 살던 집
거제도 지세포리 항포구
멀리 대마도가 보이는 서이말 등대로 가는 길은 지세포구를 지나야 한다.
행정 구역상 일운면 지세포리 이지만
지세포리에는 일운 면사무소가 위치해 있고
거제도 동남부 해안가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장승포항, 옥포항, 고현항등과 함께 거제도에서 유명한 항포구 이며
최근에 가장 많이 개발이 되어 전국에도 알려진 큰 규모의 항포구가 되어 있다.
서이말에서 등대지기 3대를 이어가던 현셕의 조부모도
이곳 지세포항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전에도 내가 1986년에 거제도로 들어와서 13년 동안 살면서
어촌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글을 남긴 적이 있는데
한국전쟁 후 포로수용소가 생기기 전에도
거제도에서 토박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거제도 사람들의 삶이 다른 섬마을 사람들 보다 더 애환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한반도 지리끝에 위치해 과거 왜구의 침입도 자주 있어 피해도 많이 많이 보았다
그래서 포구 마을 전 주민이 경남 거창 등으로 피난을 떠나
이주민 집단부락을 이루어 그지역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
특히 거제도 동남부 지방에 가면
망치, 구조라, 예구, 저구리, 여차,도장포, 대포,다대 등
마을 이름도 특이한 이름이 많았다
대한해엽이 가로막고 있는 거제도 앞 바다는 바닷물의 흐름이 무척 빠르고
풍랑도 거쎄고 해무가 낀 날이 다른 해안 지방보다 많다 .
남정네들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황천길로 가버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생계를 유지하기 소실로 들어가는 여인네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살던 지세포리 마을에도 남편이 죽은 후에도
형님동생 하면서 사이좋게 살아가는 소실들이 여럿 있었다 .
그 당시에는 소실로 들어가는 것이 큰 흠이 되지도 않았다 .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굿을 하는 집도 많았다
대문에 대나무 깃발이 걸린 무속인 집도 많았다 .
내가 1986년에 거제도에서 살았는데
지세포리 선창마을 가는길 언덕위에 지어진 단독 사택에서 거주를 했었다
내가 살던 집 바로 아랫 집에 무속인 집이 있었다
밤에 마을에서 굿하는 소리가 자주 들려오곤 했었다.
-- 계속[수정중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