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탄 인물화 / 배우 이소룡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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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관객들은 작가이자 감독인 이소룡이 죽기 전에 남긴 비극적일 정도로 적은 수의 작품들을 보면서
왜 그가 그렇게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소룡의 영화들은 솔직히 다소 평범하고, 무술 동작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성룡이나 이연걸, 토니 쟈 같은 후배 배우들이 보여준 것이 더 멋지고 화려하다.
그러나 이소룡이 길을 열어놓지 않았다면 그 후배들 중 아무도 그렇게 스타 배우로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소룡은 1970년대의 세계적인 아이콘이었고 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이소룡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홍콩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하다가 1970년대에 스크린에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가장 기억할 만한 초기 출연작은 「인해고홍(1960)」이다.
이소룡의 부모는 말썽 많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던 그를 다시 미국으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쿵푸학교를 열고 텔레비전 시리즈 「그린 호네트(1967~1967)」에 출연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계속 텔레비전에서 활동했고 자기만의 격투 스타일인 절권도를 개발했다.
1970년대가 시작될 때 그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배우이자 감독인 나유의 「당산대형(1971)」과 「정무문(1972)」에서 주연을 맡았다.
두 영화는 홍콩에서 대단한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소룡에게 새로운 배우의 경력을 열어주었으나,
그 경력은 영화사에서 가장 비극적으로 짧게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1973년에 아주 인기 있는 「용쟁호투」를 만들었고,
그 1년 전에는 「맹룡과강」으로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서구에서 이소룡이 누리고 있는 명성은 대부분 그의 사후에 형성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계 액션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수십 명에 이르는 자신의 모방자들의 존재도 알지 못한 채, 1973년에 뇌부종으로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
출저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