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부 ~ 5부)무속인 선재할멈

2009. 3. 6. 19:01자전적 소설[후박나무 전설]

거제도( 1986년~1998년 ) 에서 쓴 일기장 중에서


제 4부 무속인 선재 할멈


서울 마포구 대흥동  지하철 2호선 이대역 출구를 나와서 노고산동 방향으로 오다 보면
전철역에서 2-3분 거리 좌측 편으로   오래 된 주택집들이 많이보인다. 
재개발  예정지인 이곳 동네  약간 경사진 골목 안을 들어서면  ㅇㅇ산  선녀 ,
ㅇㅇㅇ 보살등 무속인 집과  점집들이 많이 보이는데 

전에는  집 대문 앞에 대나무 끝에 깃발이 달린 곳이 있어 무속인 집 이란 걸 알수가

있었는데 최근엔 현대식 간판으로 바뀌었다

거제도 일운면  지세포리에서 내림 굿을 받고 전통 무속인되어  이곳에 옮겨 온 무속인이 있었다
동숙이 무속인과 함께 서울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등대원 현석과 서울까지 

동숙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지세포리는 서이말 등대 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조그만 항포구 마을인데 
8~90 년대만 해도    자주  굿(얼치기 굿)을 하는소리가 밤을 세워 들리는 곳이였다
내가 성격이 예민해서 그런지   몇일만에  지세포리 집에 퇴근을 하여   

모처럼 집에서  밤에 편히 잠들려 하면  밤새 울려대는 꽹과리 소리에 화가 치밀어 

 새벽에 굿하는 집을 찾아가 꽹가리를  뺏어 온적이 있었는데
졸지에 꽹과리를 뺏겨 멍하니 쳐다보던 선재할매와 

부시시 졸린 한쪽 눈을 뒤집어 뜨고  나를 쳐다 보던   집주인 손씨 얼굴이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신령님이 노하셨다.. 약밥올려 고마 당장  죽이삔다 .'' 
한참을 어리둥절 했다가 집밖으로 쫒아  나오면서 선재 할매가 그렇게  외쳤다
'' 할무이요 ..내가 말시더  내일 아침까정  살아 있으머  깽가리  돌려  주니더 ''  

 평소에는 표준말을 억지로 쓰던 나였지만 그만 경북청송 본토배기 발음이 나와 버렸다.
 








그시절 지세포리와 인근 예구마을, 와현해수욕장 마을 에는

집 대문 앞에다  대다무를 꽂고 그위에 희거나 붉은 깃발 또는
후박나무 붉은 새순을 꽂아 무속인 집 임을 표시 하는 집들이 많았 었는데
후박나무 는  보기에는 동백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동백나무보다 는 잎이  좀 더 거칠고 

커가면서 나무 껍질이 두꺼워 진다     암수가 따로 구분이 되는데 동백처럼 이쁜꽃은 

피우지는않고  봄에 새순이 나면 암나무 새순은 피를 뿌려  놓은듯 붉은색으로 보이는데 

 마치 새빨간  꽃 처럼보인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파란색 잎으로 변한다.
이  후박나무 암나무  껍질을  벗겨 내어 한약제  계피나무 대용으로 쓰는데

시중에 나와있는것이 계피 나무인줄 알지만 사실은 대부분 후박나무 껍질이다 

이 후박나무는 거제도 와 통영 비진도 일대 에서만  자라는  특이한
나무로서  섬 사람들은  아무리 궁해도 후박나무를  땔감으로 쓰지 않는다. 

땔감으로 쓰면 그 숯이 유골처럼 변하고

후박나무를  베어서  땅에 묻으면 송장으로 변한다는 미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

 

 지세포리에서 살고있는 무속인 선재할매와 쪽제비할매

그리고   남편(등대지기 1대)을 먼저 보내고

 지세포에서  홀로  살고있는 아흔 가까운  현석씨  조모는 서이말 등대 근처 

야산으로  약초를 캐러 자주 오는데     아직도 정정한
현석씨 조모는  부친 인  등대 김소장이  서이말  등대에 근무를 할때면  등대숙소에서

 기거를 하고 돌쇠 할멈과 같이 약초를 캐면서 소일 하였다.

선재할멈은 서이말 야산에 약초를 캐러오면  돌쇠 할멈집에서  자주 머무는데

등대에서 지세포리 까지는  차가 다니는 도로가 나기 전에는  

등대 뒷산길을 따라 10여리 넘게 오솔길은  걸어 나가야 지세포리가 나온다.  

 어린시절 현석과 동숙이 이 먼 산길을 걸어서   지세포리에 있는   학교에  다니곤 했는데
 언제나 등대원과 돌쇠영감이  마중을 나가곤 했던 길인데 이 산길은 

 고목의 동백나무숲과 바위길이 잘 어우러져 경치가 좋았으나
산중턱 으로  도로가 생기면서 사람들 발길이 없어진후  지금은 잡목으로 우거져 있다.

 

                                                               

                                                                      

                         

                

  제 5부  뭍으로 비치는 인간등대

 

홍도등대(통영군 갈매기섬)에서  지난 2년간 근무를 마치고 서이말 등대로

온 박영준 소장은  1950년대에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항만청 지금의 7급상당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마산항만청에 잠시근무를 하다가   젊은나이에

곧바로 서이말 등대의 소장 보직으로 발령을 받아왔는데  당시에는  지금의 홍도등대로 가 있는 

김형진 소장의 부친이 등대원으로 근무 하고 있었다  김소장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부터  등대원으로

근무를 해온 사람이였다 .   

박소장은 돌쇠영감 내외가 자식이 없이 지내는걸 보고  거제도 저구리 포구에서   젖먹이때 고아가된

동숙을 포대기에 싸와서  돌쇠영감 내외의 수양딸로 삼아주었다.      거제도 저구리 항포구는  박소장이

 통영 소매물도 등대에서 근무를 할때   등대로 복귀할때는  본가인 마산에서 거제대교를 지나 

 거제도 저구리포구 까지와서  소형 선박 (통통배)을타고  소매물도 들어 가곤했는데    

지금도 통영항 (당시는 충무항)에서 소매물도등대섬으로 이동을 할려면 1시간 이상 여객선을 타고

 큰 매물도에 접안을 한후  간조( 썰물-바닷물 빠짐) 시 까지 기다렸다가 바닷길이 열려야만

소매물도 등대섬으로 이동하게 된다.

 수양딸 정숙은 박소장이 자주 이용하는 소형선박의 선장의 딸이였다.     그선장이 어느날 큰배를 타고

바다멀리 고기잡이 나갔다가   거센 파동 휘말려 숨지고 말았는데   선장의 아내마저   그충격으로

젖먹이인 동숙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박소장이  돌쇠영감 부부에게 이들의 인연을

 맺어 준 것이다.

 

 

  늦은 오후  등대원 중간고참 급인 정주사가  등대로 올라오라고 나를 불렀다. 

 '' 김주사님 ..이삿짐 정리는 다 하셨나요?. ''     

매물도 등대에서 서이말 등대로 온 현석에게 내가 물었다.

''  짐이라고   뭐  별로 있어야죠 ''  하고   현석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 김소장을 닮아 언제 나 웃는 인상이다   마산 본가에서  휴가를 마치고 매물도 등대로 복귀해서

짐을 싸가지고  서이말 등대로온  현석씨와 작년에 서이말 등대에온 정주사가 등대 근무를 하고  있고 

홍도등대에서 새로온 박소장은 간단히 짐을 풀어 놓고  오던날 곧바로  마산본가로 휴가를 떠났다.

등대에서 먹는 음식이라고는  됫병소주 한병하고  얼마전 돌쇠 할멈이  박소장 배웅차

보급선  기다리며 바닷가에서 따온 따까비 (바다 고동류)삶은것이  전부이지만 

적막한 날바람 소리와  가끔식 울려대는 뱃고동 소리를  들어가면서 소주잔 기울이는것도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또다른 작은 낭만이 따로있다.

 

서이말 등대 아래  바닷가 선창 내려가는길  좌측편으로는  후박나무숲이 우거져있고 

그아래로는  코키리동굴 바위와  웅장하게 앉아있는 무릉바위가 있다.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로는  어느 종교 창시자가   먼 남해바다를 건너 육지로 왔을때

제일먼저 도착한 곳이 이곳 무릉바위 였다고 한다 .

오랜옛날 용왕에게 처녀를 바친곳도 무릉바위 아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천둥이 치고  낙뢰가 내려 칠때도 이곳 후박나무 숲아래 무릉바위를 

향한다      그래서 그런지  느렁바위 근처 해상 에서는 선박침몰 사고도  많고 익사 사고도 많다. 

 그 후  무릉바위에서는    목숨을 잃은 영혼을 달래주는   굿판도 자주 벌어지곤 했다.

 

등대에도  겨울이 오고 있었다  거제도 겨울은  육지보다 그리 춥지는 않지만 

바람은 언제나 새차게 불어온다
뾰한 먼지를 날리며  등대 안으로 나라시 택시(자가용 영업차량)한대가  들어 섰다.  

박소장이 휴가를 마치고 복귀를 하는 모양이다 
지세포리에서  등대까지 오는길은  자가용 아니면 교통수단이 따로없다
택시도 다니지 않았다   걸어서 등대까지 갈려면 10여리 이상은 걸어야한다
박소장은 복귀 하자마자  등대직원들과  바닷가 선창아래 간이 창고에  내려가서   

지난 번 보급선 이 내려준 보급품을  정리하고 있다.
미처 등대로 올리지 못한것을 마저 챙기는 모양이다  그중에도 유류 드럼통이 문제다 

보급선 드럼통을 내릴때는 그물에 엮어 바다에 띄어놓고
 로프로 댕겨 뭍으로 올린다    그리고는 일일이 20리터 짜리 통에 담아 등짐을 지고

등대 막사로 올려야  겨울을 날수 있다.
이런저런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     그런 고생으로 청춘을 그리고 장년을 등대에서

외로운 삶을 을  보내고   훈장도 하나없이 정년이 되어 떠나서 지금은 마산 어느동네에서

쓸쓸히 말년을 보내는 등대지기 출신들을 볼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들은 이제는 육지를 비춰주는 인간등대 이며  진정으로  가장 삶을 보람있게 살았던

훌륭한 사람들이였다.
전쟁이 나도 적군은  등대는 폭격 하지않는 묵시된 신사협정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삶들을   귀감으로  얻고 살아야 하고
 언제나  등대 불빛처럼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은 물론이다.
''홍도에서 나올때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요?.''
등대 보급선이  홍도에서  박소장 이삿짐 싣고 올때   그때 박소장 얼굴을 첨봤다.   

보트에서 내리는   박소장의  옷이 젖어 있던걸 봐서 대략 어떠 했는지  감이 와서 

그때는 차마 물어 보지 못했다.    

순간 서이말 등대를 떠나 홍도로 가던 김소장 모습이 떠울랐다 
손수 맑금히 세탁을 해입은 잠바와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노란색 가방이  생각이 났다
'' 황천길 갈뻔 했지요..''박소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 그 험한 너울 파도를 해치고 나오신걸 보니  대단 하십니다 .''
너울파도는   일정 각으로 치는 파도와 달리 산등성이가  통째로 밀려오듯 울렁이는  파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