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의 발자취를 따라서 (6) ㅡ 수원성 동장대의 장용영 군사 진지

2016. 7. 22. 16:47사진쟁이 길을 나서다[저작권]

                

                 5년 전  나는 남양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정약용선생의 생가[내 블로그에 저장]를 둘러보면서

             그곳에 남겨져 있는 유물 거중기를 직접 본 일이 있다.

             그 거중기로 아래 사진의 수원성을 축조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조선왕조 실록중 가장 흥미로운 페이지가 있는 정조시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했고 그후

             정조 임금의 발자취를 찾아 화성행궁,수원성, 융건릉, 독산성등 역사의 뒤안길을

             여행을 하는 재미를 느껴  내블로그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2013년  눈 내린 겨울  화성행궁과 팔달산 서장대를 둘러보고 내블로그에 글을 쓴 일이있다

 수원성을 갈때는 수원성 전체를 둘러 볼 예정 이었으나 수원성 전체를 걸으면서  돌아 볼 수는 없었다

수원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 방면은 훗날 둘러 보기로 하였는데 계절이 몇번이나 바뀐  후  비오는 여름날 둘러보게 되었다  

여기서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한다

동장대는 이름 그대로 동쪽에 있는 장대이다

서장대는 주로 망을 보던 곳이라면 동장대는 훈련용으로 지어 졌다

그래서 일부러 터를 넓게 잡았으리라 생각된다

지금도  동장대에서 정조임금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최근에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 중인 정조시대 정리의궤중에 
     동장대에서 정조임금이 장용영의 군사들을 사열하는 모습을 그린 '동장대 시열도'가 최초로 공개가 되었는데

    이는 1976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탄신일에 그려 졌다고 한다  이번에 프랑스에서 정리의궤가 발견되기 전에는

동장대에서는 호궤라는 일종의 회식과 낙성연 같은 행사가 열린그림만  있었는데 이번에 발견된것은

정조임금의 군영을 사열하는 의궤가 발견되었다

동장대시열도 이미지는  저작권 관계상  내블로그에 첨부를 못했다(경인일보 참조)


휴대폰 사진들




장용영은

 국왕의 호위부대로 조선 후기 1793년[정조17년]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이였다

정조시대 장용영은 후세 군사학자들 에게도 연구 대상이였다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1785년에 장용위라는 국왕 호위의 전담부대를 창설하였다.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두어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체제로 만들었다.

그 뒤 1793년에 그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시키니, 이것이 곧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영은 1월에 수원을 유수로 승격시켜 장용외사의 직을 겸하도록 함에 따라 자연히 도성의 본영을 내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내영의 지휘관인 장용영병방은 장용사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외영제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에서 정2품의 유수로 승격시켰다 
 외영의 편제는 행궁을 교대로 방비하는 입방군과  유사시에 동원해

성내의 군사를 돕도록 하는 인근 고을의 협수군으로 구성되었다.



정조임금은 왕위에 오른후 사색당파라고 불리우는 붕당정치를 막으려고

 탕평의 정신을 계속 이으려고 했었지만   선대의 숙종과 영조의 탕평책 방법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였다 .

 정조는 영조와 다르게  인재 등용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옳은 자만 등용하겠다는 준론탕평책을 실시한다.

 이른바 시파등용이 그것이었는데 이 준론탕평책은 앞서 실시된 탕평책에 비해

분명 합리적인 정책이었지만 몇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였다

 국왕이 직접 나서 신하들의 시시비비를 판단하려면 신하들의 반발을 막을 군사력과 지지세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에 걸맞는 학문적 능력도 갖추어야 했었다  정조는  모두 갖춘 국왕이었다.

 일단 정조 자신이 조선 제일가는 학자였고, 장용영을 확대 개편하여 조선최대의 무력집단을 휘하에 두었다.

또한 규장각[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의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실학적  학자인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등을 등용하는등  초계문신제도를 활용하여

자신의 지지기반 또한 단단히 만들었다

확실히 탕평책은 정조의 것이 단연 우수하였다고 할수있다



국왕은 자신이 아끼는 신하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려 판단하였으므로

불만세력을 최소화 하였고 신하들은 국왕에게 아첨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처신에 더욱 신경쓰게 되었다

하지만 준론탕평을 시행하려면 국왕의 능력이 매우 중요하였고 국왕이 능력이 없다면 실시조차 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정조가 사망하고 능력이 떨어지는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탕평정국은 무너지고

세도정치가 등장한다는 것에서 잘나타나고 있다

세도정치는 숙종~정조 때 까지 키워놨던 왕권을 국왕이 잘 활용하지 못하고

그 대신 외척들이 대신 활용하면서 나타난 비정상적인 정치형태이다

 따라서 국왕이 정조와 같은 능력자일 경우에는 탕평책이 더 낫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서로 상호견제하여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붕당정치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죄인의 아들[사도세자]이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완벽한 스승이자 왕이 되고자 하였으나 국가는 이미 말기적 상황이라 암살 당할 뻔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기도 하였다




수원성은 18세기 말 경기도 수원시 둘레에 쌓은 성이다

수원 주민들의 안정과 영주를 위해 1794년 2월 짓기 시작해 96년 9월에 완공했다.

전통적인 성 쌓는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성의 장점을 종합했으며 발달된 무기사용을 고려했다.
 또한 성을 쌓는 데는 유형원·정약용 등의 과학기술을 활용했는데 거중기를 사용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뒤에는 팔달산이 있고 앞에는 넓은 벌판이 있는 지형을 이용해 산성과 평지성의 이점을 잘 종합했다.

종래 평지에 쌓은 성은 사람들의 거주 목적으로 만든 읍성이며 전쟁에 대비해서는 따로 산성을 만들었던 것에 비해

수원성은 읍성에다가 방어력을 강화함으로써 전시에까지 대비하게 했다.

또한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도 아울러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종전의 성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5km로 성 밖으로 19km쯤 떨어진 거리에 깊이 4.5m의 도랑을 파고 물을 대고
 성 밖의 일정한 구간에는 나무를 심지 않아 적이 접근할 경우 쉽게 발견할 수 있게 했다.

 성안에는 여러 누각을 배치해 도시의 권위를 높이고 겉보기에도 좋게 하려고 했다.

성벽둘레에는 여러 가지 방비시설이 설치되었는데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 방어체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우수한 우리나라 중세 성곽의 건축기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75부터 4개년간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문화재적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국립극단의 연극 `혜경궁 홍씨` 는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긴장감이 흐른다..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성대한 진찬례[회갑연]을 준비한 정조임금은
 외척을 배척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말하는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충돌한다
  "외갓집의 맺힌 한은 어찌할 것이오?"라고 혜경궁 홍씨가 묻는다.
그러나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실 때 두 분[외조부 홍봉한과 어머니]은 왜 모두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까?.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라며 오히려 어미의 잘못을 따진다.
즉위하자마자 외가를 몰아낸 정조의 마음은 차갑다.
이 회갑연도 단순한 잔치가 아니었다. 죽은 아버지의 복권을 연출하는 무대였다.
정치 반대편에 서 있는 친정과 아들 사이에서 평생 고통스러웠던 혜경궁 홍씨.
 모정으로 아들을 끌어안아야 하는 여인의 한숨이 객석에 깊이 박혀 있었다
10살때 세자빈으로 들어와 궁에서 동갑내기 남편 사도세자를 만난  순수했던 어린시절 그리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어 점점 미쳐서 변해가는  남편 사도세자를 지켜봐야 했으며
정쟁에 휩싸인채 영조에 의해 아들이 보는 앞에서 뒤주에서 죽어가는 남편 바라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는
현제 이시간에도 우리들은 영화에서 그리고 방송에서 드라마로 보고있다 ..






화성행궁은 수원화성으로 둘러쌓인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이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양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행궁은  평소에는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곳으로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며,
 성곽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행궁터는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한국의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으로,
 1796년(조선 정조 20년)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사도세자]의 능침인 화산릉[지금의 융건릉 자리]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자주 쉬어갔다.

 당시에는 봉수당과 경룡관 ,복내당,·유여택,·노래당,·신풍루,·남북군영,·집사청·서사청·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만 남게 되었다.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인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경의왕후)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 양식의 팔작지붕집인데,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이어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인 화령전이 재건되었다

 



   

    최근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서 발견된 정조시대 의궤에서는

    화성행궁의 궁궐 대문인 신풍루의 문양이 지금의 2극 태극문양이 아닌

    3극  태극 문양으로 되어 있는것이 새로 밝혀져 역사학계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