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6. 13:35ㆍ청솔의 수묵화
나는 우라나라 전통 한복을 입은 인물 수묵화를 자주 그리면서
옛 사람들의 착용 복장에서 부터 신분의 차이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수가 있었는데
과거 그 시대를 살았던 양반과 상놈(양민)의 신분 차별에 대한 유래를 찾아보았다
부족 국가였던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에 이르기 까지 신분의 차이는 어느정도 있었다
지배 계급이 아니었던 일반 백성들의 신분 차별은 심하지는 않은것을 알수가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이르러 유학(유교)을 국시로 하면서 이른 바
양반과 상놈을 뚜렷이 구별하여 대대로 그 신분이 이어질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 된 것이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는 약 10퍼센트 정도의 양반이 있었고
나라 운영 기반이 이들 양반들만을 위한 나라라 해도 좋을 만한 정치였다.
원래 양반이란 동반인 문관과 서반인 무관을 함께 일컫어 양반이라고 했다
궁궐에서 조회할 때 남쪽을 향한 왕의 동쪽에 서는 반열이 문관이고 서쪽에 서는 반열이 무관이었다.
그 이후 양반이 지배층을 가리키는 지칭이 되면서
양반은 지배층인 소수 특권층으로 자리잡아갔다.
자신으로부터 4대조 이내에 9품 이상의 관직에 나간 사람이 없으면
양반 신분을 상실하고 양민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관직에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과거 준비를 해야 했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양반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가문에서 양반과 혼인을 맺는 방법이 그것이다.
과거시험의 내용은 사서삼경을 얼마나 잘 알고 시구를 얼마나 잘 짓느냐는 것이니
사서삼경이 대부분의 백성들의 생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방해만 되는 것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5j0OmkRJD8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대개는 지방 수령이 되어 임지로 나가면서
입법, 행정, 사법 등 삼권을 모두 장악하는 절대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들의 학문적 바탕이 사서삼경이 있으니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천적 지식이 들어설 자리에 실생활과 전혀 무관하고
공허한 사서삼경과 시 귀 뿐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업무를 모를 뿐 아니라 처리할 능력도 없어서
목민관이 되면 옛날부터 그 지방에서 일해오던 아전들에게 기대게 되었다.
이 아전들은 월급이 없었지만 목민관의 무지에 힘입어 관권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쥐어짰다.
이처럼 조선의 정치제도는 백성들을 수탈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후
자본주의가 싹이 트게 된 18세기에 들어서자
가난한 양반은 부유한 양민보다 못했고,
부유한 양민이나 속량된 천민들이 돈으로 양반을 사서
양반으로 행세하는 바람에
원래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이던 양반이 40퍼센트에 이르렀고
그후에도 양반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1대 중종 때부터는 군역을 대신하기 위한 면포나 현금 공납을 빠지고도
군역 자체를 면하려는 온갖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양반은 군역 또는 군역 수포제에서 제외 되어 있었으니 모두 병역 기피자들인 셈이다.
그러니 상민이나 천민을 아전이나 수령에게 줄을 대 뇌물을 써서
유학에 명부를 올림으로써 병역을 기피했다.
유학들은 군에 안 가니 당연히 양반이었다.
그러니 양반과 양민의 구별은 군에 가는 가 또는 군포를 바치느냐가 기준이 된 것이다.
또 양민과 상민의 구별을 족보 기준으로 하게 되자 천민 중에는 누구나 양민이 되려고
양민의 족보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게 되니 이들을 도와주는 척 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모리배 집단도 생겨났다.
양반 중에도 등급이 있었다.
상층 양반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한 집안이나 저명한 학자 혹은 고위 관리의 자손들이고,
중층 양반은 과거에는 합격했으나
관로에 오르지 못하고 좌수나 별감 등을 지내면서 그냥 양반 행세나 하고 돌아다닌 사람들이고,
하층 양반은 뇌물로 산 엉터리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위선과 허풍, 그리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학식자랑이 고작이었다
양반은 일을 하면 안 되었다.
자기 밭에 난 잡초 한 포기도 자신이 뽑으면 안 되고 꼭 사람을 불러 뽑아야 했다.
또한 농업, 상업, 공업 등의 천한 일을 하면 절대 안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을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조선의 상놈들이 청국으로 가면 기능인으로 대접 받았고 역
시 상놈인 도공도 일본에서는 스승의 대접을 받았다.
양반을 빼면 사람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의 상민들이 외국에서 받은 대접이 그렇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은 손으로 돈을 만지거나 세어서도 안 되고 하루에 세 끼 먹는 쌀값을 물어서도 안 되었다.
공자 왈 맹자 왈은 늘 입에 달고 다녀야 했고 잘난
조상들의 족보 혹은 뇌물로 만든 위조 족보의 조상들 이름을 외고 다니는 사람들이 양반들의 일이었다.
게다가 가세가 기울어 끼니를 못 때우고 냉수로 배를 채워도 이를 쑤셔야 했으며,
추워도 곁불을 쬐면 안 되었다.
조선이 패망하고 일제 강점기에서 하인들이 다 떠나버린 후
양반들도 각기 제 살 길을 마련해야 했지만
평생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던 그들이 얼마나 자수성가를 할수가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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