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4. 18:50ㆍ자전적 소설[후박나무 전설]
거제도( 1986년~1998년 ) 에서 쓴 일기장 중에서
이글은 거제도 서이말 등대에서
3대에 걸쳐 등대지기를 이어가는 등대원 가족과 그 등대 옆 오두막 집에서
젖먹이때 대리고 온 수양딸을 키우며 함게 살았던 돌쇠영감 내외의
실제로 있었던 파란 했던 삶의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으로 글을 써 나가고 있다
나는 서이말등대에 이웃하여 한울타리 안에서 15년을 등대원들과 함께 생활했었다
서이말을 떠난후 몇년이 더 흐른후 이제서야 이글을 정리 해서 다시 쓴다
오래 전부터 모아온 자료들이며 묻어 두기엔 너무 아까운 이야기 라서,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고, 실제와 부합 (이름은 가명)하지 않는내용이 포함 되어 소설로 쓴 것임을 밝혀 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취지를 처음 방문 하시는 분께 다시 설명 하다 보니까
내용이 중복 되어 있는부분이 있다
내가 시간이 나면 예전 자료를 정리해나가면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나중에 다시 전부 수정을 해서 하나의 글로 만들어서 다시 올린다
거제도 서이말 등대(항로표지관리소)옆 오두막 집에는 돌쇠영감(실제이름)내외가
젖먹이때 대리고온 여식아이 동숙과 살고 있었는데 거제도 저구리에서 동숙을 데려다가
이들과 인연을 맺어준 사람이 박영준 등대장이다 동숙이 어린나이에 무속인이 되어
등대를 떠나가고 돌쇠영감도 등대아래 바닷가 무릉바위 아래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황천길로 떠나면서 돌쇠할멈은 혼자가 되었다 노환으로 시름시름 앓던 돌쇠 할멈을
정년퇴직을 앞둔 박영준 등대장이 노인복지 시설로 보냈는데 돌쇠할멈이 서이말 등대에서
남은 생을 살다가 죽겠다고 양로원을 나와서 서이말로 돌아왔다.
전에는 박영준 등대장이 돌쇠할멈을 보살폈는데 정년퇴직을 앞두고 등대장도 떠나고
동숙과 어린시절을 등대에서 보내고 등대지기 3대를 이어가는 현석도 소매물도 등대로 떠나고 없지만
새로온 서이말 등대 직원들과 서이말 등대 한울타리에 있던 군부대원들이 돌쇠할멈을 돌봐주었다.
제 19부 돌쇠할멈의 유언
서이말 등대산에도 낙엽이 지고 계절은 겨울로 가고 있었다.
등대로 이르는 해안 도로가 새로 생겨 예전 등대에서 인근마을 지세포리로 나가던 등대산길은
낙엽이 쌓여 어디가 옛길이 였는지 알수가 없었다 늦은 가을 해무 (바다 구름안개)가 가득한 이른아침에
돌쇠 할멈이 나를 찾는다고 하였다 나는 하던일을 멈추고 등대로 올라갔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이미 기력이 다한 돌쇠할멈이 나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손에 뭔가를 움켜쥐고 나한테 뭔가를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병원으로 모셔야 하겠는데요.” 옆에있던 등대직원 최주사가 그렇게 말했다.
오랜세월 돌쇠할멈과 한가족처럼 지내던 박영준 등대장이나
등대지가 3대를 이어가는 현석의 아버지 김형진등대장이 서이말 등대를 떠나 있었다 .
그시절 나는 그때 군인의 신분이였지만 15년을 서이말 등대를 떠나지 않고
등대 사람들과 함께 생활 해온터라 나역시 등대의 한가족이나 마찬가지 였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는데요.” 얼마전에 새로 부임해온 등대직원 이 또 그렇게 말했다.
등대에 있는 차량 이라고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나의구형 코란도 지프차 뿐이라서
대충 짐을 챙겨 내 차량으로 병원으로 출발했다.
장차에 이런일이 있을줄은 알고 있었지만 현실로 다가오자 나역시 난감하기도하였지만
전에 박영준 등대장이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면서 일러 준대로 나는 행동했다.
서이말 등대를 떠나 마을로 나가는 비포장길을 따라 노인요양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돌쇠할멈은 뒤를 돌아 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젊었을때 부터 돌쇠영감을따라 서이말에 와서 등대 숙소옆 오두막 집에서 기거를 하며 등대일을 돕고
인근 등대산에서 약초와 나물을 캐다팔고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서 살아 왔었다.
돌쇠영감내외가 서이말 등대로오게된 사연은 등대지기 3대를 이어가는
현석의 조부모와함께 서이말 등대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등대에서 밖으로 나가는길 중간쯤에서 공고지(원래 이름 공곶이) 마을로 내려가는
삼거리 쉼터에서 차를 돌려세워 해안 절벽에 걸쳐있는 서이말 등대쪽을 돌쇠할멈이
편히 바라 볼수있게 해줬다.
아까부터 손에 뭔가를 움켜쥐고 나에게 뭔가 전해주고 무슨말을 하고 싶어 했다
‘’할머니 나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내가 그렇게 물어 보았다.
‘’이것을 동숙에게 꼭 전해주시요“
등대쪽을 한참 바라보던 돌쇠할멈이 있는힘을 다해 나에게 작은 보자기에 싼 물것을 주면서
수양딸 동숙에게 전해 주라고 아주작은 목소리로 몇마디 말을 했다.
그리고는 서이말 등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돌쇠할멈의 유언이 되었고
그후에 내가 동숙을 찾아 다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박영준등대장이 일러준대로 시립 노인병원에 도착하여 입원절차를 밟았는데
그때가 내가 본 돌쇠할멈의 얼굴이 마지막 모습이였다.
거제도 지세포리에서 서이말 등대로 이르는 언덕길옆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 돌쇠영감내외가 묻힌 곳이였는데 돌쇠영감내외가 죽고난후 이묘지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돌쇠영감의 형님이 돌보다가 돌쇠영감 형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무도 묘지를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훗날 어느 비구승이 이묘소를 찾았다고 한다 .
서이말 등대에서 인근 마을로 나가는 길은 두군데가 있는데 등대길 삼거리 쉼터에서
공고지로 내려가 예구와 와현리마을로 나가는 길과 삼거리에서 지세포리로 나가는길이 있다.
예전에는 주로 공고지를 거쳐 걸어서 마을로 나갔는데 등대에 이르는 해안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은 지세포리마을로 곧장 나간다 .
아주 먼 옛날 공고지에서 서이말로 이르는 해변가에는 후박나무 숲으로 덮힌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거제도가 원산지인 수천년이나된 토종 후박나무 당산수가 있었는데 그 마을에서는 풍어제가 열렸고
지금의 서이말 등대아래 무릉바위 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용왕제를 지내고
용왕에게 소를 잡아 제물을 바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용왕제는 풍어제와는달리 무당을 불러 굿거리를 하지 않으며 배의 선주들만이 배를 타고
서이말 해안 무릉바위로 아래로 몰려들어 용왕제를 지내곤 했다고 한다.
어느해 마을에 흉년이들고 헛소문이 돌아 마을 사람들끼리 다툼이 일어
용왕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고 용왕제를 지내지 못하였는데 그래서 용왕이 노해서
거대한 불의 폭풍을 일으켜 공고지 마을을 휩쓸게 해서 공고지 마을을 없에 버렸다고 전해진다
이곳 예구 항포구와 와현의 작은 항포구 마을은 지금부터 몇 년 전(2003년)에도 태풍 매미에 휩쓸려
마을이 초토화 되었는데 사람들이 인근의 망산을 불도저로 밀어 없에 버리고 개발이라는 명목아래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하여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러 하다고도 한다.
지금도 공고지 해변가에는 다른 해변과는 달리 검은빛의 몽돌로 이루어 있는데
그당시 흔적들로 불에 탄듯한 검은바위들이 박혀있고 땅속을 파보면 검게탄 볍씨가 나온다고 한다
그후 공고지에는 사람이 살지를 않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공고지에 몽돌로 쌓은 돌담집을 지어사람이 살기 시작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 다시 정착을 해온 몇사람들에 의해 열대식물이 심어지고
공원처럼 꾸며져 사람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로 변모되었다.
내가 이런 구전으로만 전해오는 후박나무 당산수에 얽힌 전설의 이야기를 알게된 것은
돌쇠영감 내외가 세상을 떠나고 난후 예구마을에 혼자 살고 있는 돌쇠 영감의 형님을 만났는데
그 노인으로부터 예전부터 전해져 오는 전설의 서이말 무릉바위에 얽힌 내력과 무너진 성터의 비밀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샘터의 이야기를 들을수가 수가 있었다 돌쇠영감 형은 팔순이 넘었는데
거동이 불편하고 백내장으로 앞을 잘보지는 못하지만 기억력 만큼은 또렷하고 말씨도 창창 하였다 ....
중략 계속이어짐
당시 경남신문사에서 기자가 찾아와
내가 쓴 글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여 준비하였던 원고인데
내가 갑자기 경북 울진으로 전근을 가는 바람에 보내지 못였다.
[참고] 거제도 공고지(원래이름은 공곶이)
공곶이는 토기와 패총등 선사시대 유물이 많이 발견된곳으로
최근에는 유원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해방이후 한두 가구가 이주 해와서
살기도 했었는데 다시 떠나가고 빈집만 남았다고 한다.
그후에 공곶이에서 사람이 들어와 살기한것은 1950년대 후반 이였다고 한다.
이곳은 강명식(75).지상악(71)씨 부부가 1957년에 이곳에 이주를 해온이후
50여년간 이들은 산에다 계단식으로 돌을 쌓고 식물을 심고 다듬어왔다.
외도와 달리 자연그대로의 풍광이 주변경치와 잘 어울리는 곳이다.
외도가 비밀의 공원이라면 공고지는 비밀의 정원이다.
거제시 일운면 예구리에서 20여분 산능선을 넘어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어 오염이 안된 한적한곳이다
동백과 봄꽃, 열대식물, 1만여그루의 종려나무 등이 볼만한데
영화 ‘종려나무숲’의 촬영지로 관심을 끌고 있다.
여주인공 김유미의 집으로 나오는곳이기도 하다. 영화 제목처럼 종려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곳은 사진에서 보듯이 작은 몽돌해변 너머에 내도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멀리 해금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등 경관이 빼어나 제2의 외도로 불린다.
특히.봄에는 마치 하얀 눈이 내려 않는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하얀
이팝나무꽃과 가을에는 서이말등대로 가는길에 빨간 자귀나무꽃이 아름답게 핀다.
이른 봄에는 병아리때가 몰려있는 듯한 노란 수선화가 만개를 하기도 한다.
사진은 몽돌로 이루어진 공곶이 해변으로
현제 거제도에 살면서 거제도 이야기를 꾸며주시는
빨강머리앤님의 블로그에서 가져 왔다
아래는 참고문헌
○ 공곶이마을
와현 동남쪽 망산(望山)에 이르는 2㎞의 반도가 길게 뻗어 지리끝 서이말(鼠이末)을 이룩하였고
중간에서 서쪽의 지맥 끝에 공곶이의 땅끝으로 공곶(鞏串)이 마을이 있다.
○ 와현(臥峴)마을
본래 누우래, 누우뢰, 눌일, 눌일티 또는 와현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세포 고개가 낮아 올라서 보니
남에는 구조라만이고 북에는 지세포만에서
드나드는 고깃배를 누어서 보다가 잠이 들었으니 누우래라 하고 와현리(臥峴里)로 하였으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의하면
일운면(一運面)은 남북으로 거제도를 동삼면(東三面), 서사면(西四面)으로 갈랐고 동남끝의 와현(臥峴)과 북서끝의 와치(臥峙)로 양쪽이 누웠으니
1914年 3月 1日 우리나라 두번째의 큰섬 거제군(巨濟郡)은 통영군(統營郡)에 통합되어 39년간 군(郡)없이 살아왔다는 구전이 있다.
○ 예구(曳龜)마을
본래 왜구미방(倭仇味坊)으로 왜구, 왜구미, 외기미라 하였는데 이는 왜나라의 어선이나 왜구들이 침범하여 왜구미라 하였으며
고종(高宗) 26年(1889)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어선(日本漁船) 예인망(曳引網)이 들어와 예구(曳龜)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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