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유적지에서 - 유관순열사와 보각스님

2013. 3. 6. 07:00사진쟁이 길을 나서다[저작권]

          

         1907 4월부터 12월까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는데 
         그해 8월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의 이름으로

         82명의 교인과 동리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 조인원, 유중무와 유우석의 이름으로 

         유중권 등 3.1운동의 주역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9월 3일 아침 조치원 북쪽의 소정리 정거장이 의병부대의 공격을 받아 불탔다.

         하반기부터 의병운동이 병천 주변에서 격화되었다.

         가을(10월 말경) 목천 교회가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2013년3월1일사진  

 

          1919년 4월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2013.3.1.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인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그녀의 어머니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유관순 열사는 숙부인 유중무와 조인원, 조병호 부자, 김용이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6년 세수 103세. 법랍 49세로 입적한 보각스님(속명 이정수) 이 있었다

  1904년생인 보각스님은 1919년 이화학당 시절 친구인 유관순 열사와 함께 3ㆍ1운동을 했다.

  보각 스님은 이화학당 시절 자신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나이는 두 살 위인 유관순 열사와 5년간 한방을 쓰며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3.1  만세운동 으로 혹독한 고초를 겪었지만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보각스님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두 아들과 남북으로 떨어져 살게 됐다. 이때의 아픔이 결국 출가로 이어졌는데

  출가를 하면 세속의 인연을 끊어야 하지만, 모정은 끊을 수 없었다.

  스님은 하남시 배알미동(수자원공사 쪽의 검단산 등산로)의 절을 인수해 증개축을 거쳐

  암자이름을 ‘통일정사’로 지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상봉발원단을 만들어 가슴에 묻은 두 아들과의 만남을 평생 염원했다.

 



  3ㆍ1운동 당시의 상황과 유 열사의 활동상을 증언했다.

 스님의 귀중한 증언으로 유관순열사의 한자이름과 출생ㆍ사망일에 관한 논란이 종지부를 지을 수 있었다.

   보각스님은 3ㆍ1운동 당시 그때 돈으로 1원을 들여 종이와 빨간색 파란색 물감을 사서

   태극기를 그렸다고 생전 회고했다.

   태극 도안은 밥공기를 엎어놓고 그렸지만 팔괘의 모양은 정확히 몰라 대충 흉내만 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태극기를 실제 본 사람이 많지 않아 정확한 모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기숙사 방마다 붙여 다음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며칠 후 이화학당 학생들은 서울역에 나가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스님의 친구인 유관순열사는 가장 적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