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1. 18:26ㆍ사진쟁이 길을 나서다[저작권]
오래전 나는 남양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정약용선생의 생가[내 블로그 저장]를 둘러보면서
그곳에 남겨져 있는 유물 거중기를 직접 본 일이 있다.
그 거중기로 아래 사진의 수원성을 축조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조선왕조 실록중 가장 흥미로운 페이지가 있는 정조시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했고 그후
정조 임금의 발자취를 찾아 역사의 뒤안길을 여행을 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것이다
내가 10여전에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를 온후 수원성을 둘러 본일이 있는데
그당시에는 대충 이곳이 성의 누각과 봉화대 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이제서야 이곳이 장용영의 지휘소 였으며 봉화대가 아니라 활을 쏘는 곳이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
하기야 그때는 주차비나 관람료가 없었으며 지금처럼 성주위가 잘 단장 되지도 않았지만 ..
그리고 내게 장용영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남달리 더 다가오는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때
어느 지방직 공무원시험을 치룬 일이 있었는데 그시험에 장용영에 관한 문제가 출제 되었다
결국 그문제를 풀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래도록 내 기억속에 남아 있다 .
장용영의 문제는 기타 시험에도 자주 출제가 되었는데 장용영의 역사 배경을 찾아 들어가면 사실 어려운 문제풀이 이기도하다.
아래사진 수원성의 서장대 장영용의 지휘소
정조임금은 왕위에 오른후 사색당파라고 불리우는 붕당정치를 막으려고
탕평의 정신을 계속 이으려고 했었지만 선대의 숙종과 영조의 탕평책 방법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였다 .
정조는 영조와 다르게 인재 등용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옳은 자만 등용하겠다는 준론탕평책을 실시한다.
이른바 시파등용이 그것이었는데 이 준론탕평책은 앞서 실시된 탕평책에 비해
분명 합리적인 정책이었지만 몇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였다
국왕이 직접 나서 신하들의 시시비비를 판단하려면 신하들의 반발을 막을 군사력과 지지세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에 걸맞는 학문적 능력도 갖추어야 했었다 정조는 모두 갖춘 국왕이었다.
일단 정조 자신이 조선 제일가는 학자였고, 장용영을 확대 개편하여 조선최대의 무력집단을 휘하에 두었다.
또한 규장각[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의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실학적 학자인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등을 등용하는등 초계문신제도를 활용하여
자신의 지지기반 또한 단단히 만들었다
확실히 탕평책은 정조의 것이 단연 우수하였다고 할수있다
서장대의 화성장대라고 쓴 편익[지휘소 간판 ]은 정조임금이 직접 쓴 글씨라고 ..
국왕은 자신이 아끼는 신하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려 판단하였으므로
불만세력을 최소화 하였고 신하들은 국왕에게 아첨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처신에 더욱 신경쓰게 되었다
하지만 준론탕평을 시행하려면 국왕의 능력이 매우 중요하였고 국왕이 능력이 없다면 실시조차 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정조가 사망하고 능력이 떨어지는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탕평정국은 무너지고
세도정치가 등장한다는 것에서 잘나타나고 있다
세도정치는 숙종~정조 때 까지 키워놨던 왕권을 국왕이 잘 활용하지 못하고
그 대신 외척들이 대신 활용하면서 나타난 비정상적인 정치형태이다
따라서 국왕이 정조와 같은 능력자일 경우에는 탕평책이 더 낫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서로 상호견제하여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붕당정치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죄인의 아들[사도세자]이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완벽한 스승이자 왕이 되고자 하였으나 국가는 이미 말기적 상황이라 암살 당할 뻔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기도 하였다
여기서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한다
수원성은 18세기 말 경기도 수원시 둘레에 쌓은 성이다
수원 주민들의 안정과 영주를 위해 1794년 2월 짓기 시작해 96년 9월에 완공했다.
전통적인 성 쌓는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성의 장점을 종합했으며 발달된 무기사용을 고려했다.
또한 성을 쌓는 데는 유형원·정약용 등의 과학기술을 활용했는데 거중기를 사용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뒤에는 팔달산이 있고 앞에는 넓은 벌판이 있는 지형을 이용해 산성과 평지성의 이점을 잘 종합했다.
종래 평지에 쌓은 성은 사람들의 거주 목적으로 만든 읍성이며 전쟁에 대비해서는 따로 산성을 만들었던 것에 비해
수원성은 읍성에다가 방어력을 강화함으로써 전시에까지 대비하게 했다.
또한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도 아울러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종전의 성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5km로 성 밖으로 19km쯤 떨어진 거리에 깊이 4.5m의 도랑을 파고 물을 대고
성 밖의 일정한 구간에는 나무를 심지 않아 적이 접근할 경우 쉽게 발견할 수 있게 했다.
성안에는 여러 누각을 배치해 도시의 권위를 높이고 겉보기에도 좋게 하려고 했다.
성벽둘레에는 여러 가지 방비시설이 설치되었는데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 방어체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우수한 우리나라 중세 성곽의 건축기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75부터 4개년간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문화재적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이 봉화대처럼 보이는데 화살을 쏘는곳이라고 ..
장용영은
국왕의 호위부대로 조선 후기 1793년[정조17년]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이였다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1785년에 장용위라는 국왕 호위의 전담부대를 창설하였다.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두어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체제로 만들었다.
그 뒤 1793년에 그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시키니, 이것이 곧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영은 1월에 수원을 유수로 승격시켜 장용외사의 직을 겸하도록 함에 따라 자연히 도성의 본영을 내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내영의 지휘관인 장용영병방은 장용사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외영제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에서 정2품의 유수로 승격시켰다
외영의 편제는 행궁을 교대로 방비하는 입방군과 유사시에 동원해
성내의 군사를 돕도록 하는 인근 고을의 협수군으로 구성되었다.
수원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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