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세월은 끝났지만 상처는 (철사 줄에 묶인 나무)

2018. 10. 4. 14:41청솔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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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이긴 고통


삶을 살아가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모두가 바라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면서도 불행하다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사랑 속에서 느끼는 고통은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가.

영화 속 버지니아 울프, 로라, 리차드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나름 평화로운 환경을 두고 죽음을 선택하거나 그것들을 버린 채 떠난다.
그것이 단순히 우울증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부족하다.
행복의 조건이 행복을 보장해주며, 삶의 동력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그런 환경들이 그들이 갖고 있는 상처와 실존의 고통을 더욱 부각시키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받은 상처를 지닌 채 세상과 사람을 불신하고 불안한 상태로 살아온 버지니아와,
영화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깊은 고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삼키며 버텨왔던 로라.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를 평생 지닌 채 살아온 리차드.
그들은 모두 자신을 사랑해주던 레너드와 남편, 자식 그리고
 클래리사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먼저 세상을 등졌을지도 모른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았지만, 로라 브라운 역시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가족을 떠나는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은 현재 실존의 일상을 제거하거나 그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자신을 지켜내는 행위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을 통해 역설적으로 실존의 고통을 끊어버렸듯이, 로라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버렸다.


그냥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다 중요한 질문은 어떤 힘으로 살아야 하는지다.
그리고 존재와 실존의 문제의 답을 찾는 과정, '나' 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과 사랑이다.
 이런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행복의 조건인 사랑과 가족, 가정의 가치를 좇을 수 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 행복의 조건을 쌓는 일은 마치 입꼬리는 미소를 짓지만,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로라의 모습처럼 슬픈 행복, 슬픈 화목을 추구하는 일이 될지 모른다. 

레너드의 사랑과 헌신마저도 버지니아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처럼,
함께한 오랜 세월과 소중한 시간들도 결국 간직할 수밖에 없는 추억으로 잊혀지는 것처럼,
사랑과 시간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에겐 위대한 사랑과 세월마저도 이기는 고통이 있다.
그 고통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진정 죽음과 떠남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