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5. 19:06ㆍ청솔의 수묵화
강감찬 장군이 권력에 욕심이 있었다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때 처럼 왕이 될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
그당시 거사를 단행하고 과거 거란에 항복했던 간신들을 몰아내고
거란에게 뺏긴 옛 발해 땅을 되 찾고 그 당시부터 싹티운 중국 사대주의를 없에 버렸으면
훗날 역사는 또 달라 졌을텐데 장군께서 연세(칠순)가 너무 많았던 같다
그 후 강감찬 장군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조용히 살았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그리는 과정의 영상이 보입니다
과거 소손녕이 이끄는 20만 거란군의 1차 침입때 서희의 담판 외교로 물리친것 처럼 교과서에는 써있지만
침입 과정에서 당시 중국 대륙에서도 악랄하기로 유명한 거란군에게 고려의 민초들은 엄청나게 당했다
고려왕조가 더러운 오랑캐민족이라고 상대도 않던 거란족에게 과거 몽고 침입때보다 더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전쟁사의 기록들이 사실대로 쓰여지지를 않았는데
교과서에는 거란의 1차 침입을 80만 대군이라고 적혀 있지만 그당시 송나라와 중국의 대륙전쟁을 하던
거란이라 그렇게 많은 병력을 보낼수가 없었다
2차거란의 침공은 소배압이 10만 정예 부대를 이끌고 꼬리를 자르면서
남하를 계속했다 개경 까지만 진격을 하면 1차 전쟁처럼 처럼
궁성을 열고 항복할줄 알았는데 (사실 현종임금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궁궐의 대문을 열어 놓았다)
고려 20만 주력부대가 멀리 청천강에 포진되어 있어서 궁궐 수비병력은 겨우 몇백명뿐이 였다
왜 소수만 남겨두고 멀리 청천강까지 갔었는지는 지금도 여러 설 이 있다
그당시 소배압이 그대로 개경까지 밀고 들어 왔으면 궁궐을 내어 줘야만 했다
그러나 고려 매복군대(게릴라전)에 의해 몇번 식껍을 하더니
생각이 변한 소배압이 그만 퇴각을 명 하였다
원래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적은 그냥 퇴로를 열어 주는게 상식인데
귀주 벌판 (강이 아니며 귀주대첩에는 수공 격퇴가 아님 →훗날 정정)에서
강감찬 장군은 달아나는 소배압의 군대를 가다렸다가 속된말로 아주 아작을 냈다 .. 다시는 못쳐들어오게
그 마지막 전투에서 죽자고 덤비는 소배압의 10만 군대와 20만명의 고려의 군대가
서로 밀고 당기기를 수일간 다행이 역풍의 세찬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화살과 불길이
적으로 향해서그 싸움에서 승리를 했다고 한다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이 별로 없었다 고려군도 반토막은 났지만 ..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을 현종 임금이 손수 먼길 마중을 나가서
금으로 만든 꽃을 하사 하였다는 내용, 우리가 초등학교시절 배운 교과서에 쓰인 글귀가 생각이 난다
당시 현종임금은 강감찬 장군을 마중 나가야만 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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