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갓 망건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2022. 1. 21. 13:56청솔의 수묵화

필자의 유년 시절 시골 마을에도 한복을 입고 머리에 갓을 쓰고 다니던

노인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과거 주로 양반들이 머리에 쓰고 다닌 갓과 망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예로부터 갓은 목숨이자 자존심이었다.

 


갓은 또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남에게 알리는 사회질서의 한 부분이었다.

갓을 벗고 씀에 상징성 크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머리 장식의 세세한 부분까지 나라가 통제

하였는데 규제가 오히려 크고 신분이 높아짐에 따라 화려한 갓이 만들어졌다

예로부터 갓은 목숨이자 자존심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35Oa5DcNao 



갓은 또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남에게 알리는 사회질서의 한 부분이었다.

갓을 벗고 씀에 상징성 크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머리 장식의 세세한 부분까지 나라가 통제

하였는데 규제가 오히려 크고 신분이 높아짐에 따라 화려한 갓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은 갓의 규격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그후 고종 때 신분제도 철폐되면서  갓을 쓰고 다니던 풍습이 점점 사라져갔다

 

갓이 유래는  삼국시대부터 보인다.

갓은말총[말의 꼬리털 ]으로 만드는데

 

당시 몽골의 영향으로 고려말부터 

 

말총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흑립인 양반갓은 성종때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모자는 의관정제를 통해 품격을 완성했던 일종의 문화였다.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신분제의 표본이자 예의이며 자존심이었다.

 갓방에서는 장인정신을 쏟아 갓을 수선하고 새로 만드는데 '트집 잡다'라는

 말은 '갓을 인두질 하다'에서 유래했다.

 

모자는 의관의 요소로서 예를 갖추는 중요한 도구이자

 쓰는 사람의 신분고하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남에게 알리는 일이었고, 

그와 관련된 규칙은 곧 사회질서이자 질서를 시각화하는 일이었다.

특히 양반[사족]들만 쓸 수 있도록 했던 갓은 오히려 쓰고자 하는

 욕망을 더욱 강하게 부추겨 서인[서자 하류층]들도 몰래 쓰고 다녔다.

이 또한 역시 국가도 막지 못하였기에 사족들은 서인과 구분 짓기 위해 

갓은 크게, 갓끈을 길게 만들어 화려하게 치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복의 힘도 고종 때 신분제도가 

철폐되며 의복 간소화를 관철하자 점점 그 상징성은 옅어지고 결국 사라지게 됐다.

상투가 뜨지 않도록 상투가 들어갈 자리의 아래쪽 머리숱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 작업을 바로 배코(백호) 치다 라고 불렀다. 

필자의 중고교시절 뒷머리를 빠빡 밀고 다니던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배코쳤다"고 자주 놀려주던 일이있었다  단시에는 그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었다.


이렇게 배코 친 후 훤히 비게 된 정수리를 보고 흔히 소갈(속알)머리 없다 라고 표현했다.

상투를 틀고 나서 이마에는 망건을 둘렀다.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중국은 대개 비단으로 만들었고, 

조선에서는 말총으로 만든 망건이 유행이었다. 

망건 좌우에는 관자가 있는데 눈의 좌우에 있는 '관자놀이'라고 

하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