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5. 19:18ㆍ자전적 소설[여우고개의 추억]
30년만에 다시 가본 화석정과 임진나루
차라리 가지를 말고 아름답던 추억이나 그대로 간직할것을 ..
고압선 전선들이 시야를 막고, 정자 바로앞을 가로지른 4차선 도로에는
굉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율곡선생이
다시 와보면 기절 초풍을 하실 일이로다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망쳐 놓았구나
임진나루터 그곳에도 예전의 원주민과 아름다운 시골마을은 사라지고
온통 매운탕집과 펜션이 들어서있고
파해친 야산엔 온통 콘크리트 잔해들만 어지럽게 나뒹굴고 가축 분뇨 냄새만 나더라 ..
화석정은 조선의 대학자 율곡이이 선생이
제자들과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였다.
고려 문신 야은 길재의 유지가 있던 곳에
세종 25년 이이의 5대조 이명신이 정자를 짓고,
성종9년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를 한 후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임진란 때 불태워지고 현종14년 복원하였으나
6.25때 다시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은 후,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팔작지붕 겹치마가 둘린듯 하다
정자 안쪽 현판에는 율곡선생이 10세때 지었다는 시가 적혀있다.
숲속 정자에 가을이 깊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도다.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을 향해 붉구나.
산위에는 둥근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는데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울고 가는 소리 구름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으로 바로가는 대중교통편이 없어서 불편하다
이마을은 이이 선생의 이름을 딴 율곡리 마을이다
이곳 화석정입구 마을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었는데
마을 버스조차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하나둘씩 외지로 떠나가고 몇가구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석정 위에 큰길로만 다녀서
화석정 반대편 아래 마을에서 보는 고목나무있는 풍경을 모르고 지나간다
큰 고목나무 아래집에는 늙은 시부모를 모시는 젊은 아낙이 살고 있었고
개울가 옆 재래식 변소 옆에 지게가 걸려있었다
예전에 이 마을에 사는 나이가 어린 아가씨를 좋아 했었다
이제는 중년이 훨씬 넘었을텐데 ..
어느 하늘아래에 살고 있는지
혹시 이글을 보면 기억 하실려나 사연도 있었는데
듣거라 후손들아
정자 바로앞을 지나 큰길이 나도록 어이 방치를 하였는고..
그리고
강을 바로 못보게 전선줄은 가로 막아 놓았는가
멀리 망원렌즈로 본 이북 개성 송악산
두포리 전진교 부근
아마 이 사진을 보면 전에 군대생활을 했던분,
면회를 가던분들 생각이 많이 날것인데
이곳이 예전의 1 번국도 임진나루
이 포구에서 배를 타고 건너서 개성으로 들어 갔었다
서해안 간조시간이면 임진강도 따라서 수위가 낮아져
얕은곳은 바닥이 보인다
예전에 주간에만 강건너 민간인 통제지역에
농사를 지으러 사람들과 농기구를 실어 나르던 나룻배 인데 이제는 전진교가 생겨서
퇴역을 하고 쓸쓸이 고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직도 그곳에 있는 예전 사람들에게 문의를 해보니 그 배가 맞다고 했다
필자가 이배를 직접 노를 저어 강을 건너보기도 했었다
그 때는 무턱 크게 보였는데..
예전에 가계집이였는데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늘 반겨주기던 주인 할머니는 돌아 가셨다
예전의 1번국도 임진나루 포구
이곳을 따라 우리 선조들이 강을건어 개성으로 들어갔었다
강건너 민간인 통제지역, 초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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