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을 벗어들고 2시간을 걸어서 면회를 온 아가씨

2014. 2. 8. 20:58자전적 소설[여우고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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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에서 1825일 기록 중

1981년에 쓴 일기장에서


 

"김선종 이병이 소속된 중대는 훈련을 나가 있습니다." 
천리 먼 길을 통닭 등 음식을 바리 바리 싸가지고 첫 면회를 온 부모는
아들이 먼 곳에 훈련을 나갔다는 말에
그의 어머니는 위병소에서 그만 털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군부대 면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아들, 오빠, 남동생을 아니면 남자친구가 군 생활을 할 때면
거의 의무적으로 군부대 면회를 다녀오곤 한다.
군 복무 중에 기족이나 여자친구가 내일 면회를 오기로 한날
그 전날 저녁이면 군복에 날을 세워 밑이 눌어붙은 다리미로 다려서
걸어놓은 일 계상함을 바라보면서 잠을 못 이루고
내무반 머리맡 아래 광을 내어놓은
군화에 묻은 먼지를 한 번 더 문질러 보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특히 훈련소를 벗어나 자대 배치 후 첫 면회를 올 때의 추억이 가장 먼저
아련하게 떠오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금은 입대를 하고 훈련소에서 몇 주 훈련을 마치면 곧바로 면회가 이루지도 하는데

예전에는 통상적으로 자대에 배치가 되고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면회가 허락되었는데 입대 후 대략 입대 후 3개월 이상 지난 후 가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된다
위병소에서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감싸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그 당시에는 자주 보던 모습들이기도 하였다.
고향집이 먼 곳에 있는 경우는 전날 출발해서 군부대 인근 허름한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도 거른 채 면회를 신청하고 아들이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군복무중 첫면회를 오도록 하기위한 연락방법은

동료 전우가 휴가를 가는 편으로 사재편지를 부쳐서
군사 보안상 금지 되어있는 부대 지리의 상세약도를 그려 준다던지

집으로 전화를 걸게해서 면회를 오는방법을 알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것도 신병인 처지라 훈련등 일정을 잘 알지못해 가족이 먼길 면회를 와도

허탕을 치고 되돌아 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군부대 주소는 일반적으로 사서함으로 표기 되어 있어서 대략적이 위치 정보만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단위급 부대나 파견부대 주소는 원소속부대명의 사서함 주소로 되어있어
실제에 근무하고 있는 곳은 멀리 떨어져 있는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파견부대에서는  편법을 쓰는데 방법중의 하나가
인근 민가가 있는 마을에 면회를 와서 파견지에서 비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아

선임병이나 간부를 대동하고 면회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치 감시를 받고  면회를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아들의 얼굴을 보는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 함께 따라간  선임병도 덕분에 모처럼 사재 음식을 함께 먹어보고
함게 따라온 신병의 누나나 여동생의 얼굴도 힐끔 쳐다보는 재미도 있다.
그후 두번째 면회부터는 상황이 조금은 달라진다.
부모가 면회를 오는것보다 여자친구가 면회를 오는것을 내심 바라고있는는데
집에서도 부모가 이를눈치채고 입대전 조금이라도 친한 여자친구가 있으면 연락을 해서

서로가쓸 용돈을 함께 줘서  억지로라도 면회를 보내 아들이 마음잡고 군대 생활을 잘하기만을

바라는 절실한 부모의 마음들은 세월이 지난 지금의 풍경도 마찬가지일것이다.

 

"못생긴 여자들도 군부대 면회를 가면 다 이쁘게만 보인다."
1977년 00 하사관학교 훈련장에서 일이다.
입대후 한달가량은 내몸 추스리기도 바빠 솔직이 고향에 있는

가족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고표현을 해야 오른말일것 같다.
그당시 대부분 6개월이상 장기간 훈련을 받는데
어려운 군교육기관의 여건과 비신사적으로 대하는 훈련요소가 많이 있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당시에는  부사관은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군에서는 우수한 부사관 자원을 양성 하기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기술병과 지원제도 또는 금오공고 RNTC등 고등학교를 다닐때 우수한 자원을 뽑아 장학금을 지원해고

부사관으로 의무복무를 시키기도 하고 일반병으로 입대를 하였어도

갑종이상 건강한 자원을  착출을 하여 부사관으로 임용시킨 경우도 있었는데

임용후에는 우수한 자원은  시험을 치러 준사관등 장교로 이동을 하거나 조기에 전역을 하는등

그후에도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기도해서 어러번 개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상세하게 이야기 하기로 하고
부사관 훈련소에서 약 1달이 지날쯤부터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으며
그때 부터 세상 사물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 했다 .
내무반 앞뜰에 작은화단에 힘겹게  피어있는 난초처럼 생긴 것들도 눈에 보였다
약 1달 후부터는 영외교육장에서 훈련을 받는데  정문을 나와 교육장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나는 입대후 칼라색의 옷을입고 지나가는  민간인여자를 처음 보았다

물론 부사관학교 훈련소 안에서도 가끔 본일은 있지만
이동중에  "눈깔 돌리는 소리가 난다"고  고함을 치는데
눈동자도 옆으로 못돌리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군가소리에
모든 주위분위기가 함께 뭍여버리는데 부대건물 그림자에 비친 여인의 모습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훈련이 시작돠고 거의 두달이 지난 다음에 면회가 허락 되었는데
당시에 본 면회실의 모습과  세월이 많이지난 지금의  면회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때 면회를 온 젊은 여인네의 모습은 하나같이 천사처럼 보였고 모두다 아름다운모습으로 보였다.

 

"여기는 두포리 버드나무 집입니다 "
내가 근무하고 있는 파견부대의 내부선으로 일반전화가 걸려 왔다.
소초보다는 인원이 다소 많은 파견부대였는데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원소속부대는 서울 근교에 있었다.  내가 그곳을 떠난지 몇년후에는  그부대는 없어졌다
"거기에 문선종 이병이라고 근무하고 있는가요?."
문이병의 애인이라고 하면서 면회를 왔다고 한다.
어떻게 군부대 사서함 주소를 잘못 적어서  찾아 왔는지 아니면 사재편지를 받고 잘못 그려진
약도를 따라 왔는지는 모르지만  돌부리가 들어난 험한 비포장길에서 
하이힐을 벗어들고 맨발로 임진강변을 따라  걸어서
물어 물어서 정반대 역행길인 두포리 버드나무집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강 두포리 버드나무집은 간이 식당겸 휴식소로  가계를 운영하면서 당시에는 주로
인근의 군부대 장병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였는데

그시절 군지역에서  그집이 유일한 도로옆의 민가 이기도 했다. 
전진교를 건너 민통선으로 가는 길목이며 먼데서  면회온  가족들이

군부대를 찾아가는 이정표 역할을 하던곳이기도 하다.
내가 군용트럭에 장비를  견인한채 적성면 일대를 다녀 오면서 자주 들리던 곳이기도 한곳이다.
당시 군부대에서 군부대 인근에 위치한 독립가옥이 있는 민가에는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면  군부대에 신고를 해달라고 딸딸이라 부르던

군용312  전화기를 설치해 주기도 하였다.  
현제는  그 버드나무집도  매운탕 집으로 변해 있는데  파주지역에서 군생활하고 전역을한
특히 장파리, 두포리, 두지리 등 지명 이름도 군부대 냄새가는 이지역에서 머물렀던 사람들은
그당시 임진강 그곳 버드나무집에서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가게집이 생각 나는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젊은날을 보낸  인생, 삶의 이정표처럼 생각이 들곤 한다 .

 

군에서 애인이라고 하면서 면회를 신청하는 경우는 그 애인이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은 애인인가
아니면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애인인가에  따라서 고참병이라도 그날 외박이 허락이 되고
아니면 면회까지만 허락되고의 판단기준을 삼는데
사실 확인은 부대 책임자가 집으로 직접 전화를 걸던지 아니면 
양주라도 한병 간부의 손에 몰래 주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한다.
대부분 집으로전화를 걸어 확인을 해보는데
그려면 부모의 입장으로선 대충 눈치를 채고 곧 결혼할 사이이며
약혼을 하였다고 대부분 거짖말을 쳐댄다.
이렇게 외박이 결정되면  졸지에 가짜애인이 진짜애인으로 만들어 지는데
파란 군복을 입은 남자들의 모든 시선을 한꺼번에 받는 묘한 주위 환경과  검은얼굴로 변한 이 불쌍한
남자친구에게  동정심이 발동되는 분위기에 이끌려 대남방송이 울려퍼지는 전방의 어느 여관방에서
함께 밤을 지세우다가 그만 일을 저질러 장차에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되는
바보같은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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