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6. 19:56ㆍ사진쟁이 길을 나서다[저작권]
경기도 오산시와 동탄시도시 그리고 수원과 화성시를
사방팔방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는 세마산(양산봉) 정상부근에 사적 140호 독산산성이 위치해있다.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때 축성된 고성이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였는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적에게 장기간 포위당하여 식량 고갈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백마를 쌀로 세마(洗馬)시켜
적으로 하여금 성내에 식수가 풍부한 것으로 오인하게 하여 퇴각하게 하여 세마대라 칭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곳에서 변이중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 제작하게 하여 행주대첩에서 전승케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남한산성과 용인의 석성산성 등과 함께 도성 방어를 위한 삼각 체계를 형성하였다.
휴대폰으로찍은 사진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독산성에 세마대를 세우고 석대산이라 부르던 것을 세마산이라 하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 연습을 하게 했으며
선조 35년(1602) 변응성이 다시 석성으로 수축하였고 정조16년(1792) 세마대를 중수하고 세마산을 향로봉)이라 칭하였다 한다.
이 산성은 평지에서 돌출하여 사방을 두루살필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하다
개축 당시의 성 둘레는 약 3.6km, 문이 4곳이 있었으나 현재 성역 10개소, 284평에 석성 약 400m와 성문지가 남아 있으며,
세마대는 1957년 8월 15일 구기에 복원하였다. 1964년 8월 29일 사적 140호로 지정되었다.
독산성 과 세마대지 기록에 의하면 백제 시기에 축성된 고성이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였는데
현재 성역 10284평에 석성 약 400m와 성문지가 남아 있으며 세마대는 1957년 8월 15일 에 복원하였다.
독산성 성내에는 보적사 사찰이 위치해 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401년(백제 아신왕 10) 나라에서 창건했다고 한다.
산성을 만들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주대식이 약사전을 헐고 현재의 대웅전을 지으면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고 고쳤다.
1986년 부임한 주지 스님 도광이 산성 안에 있는 세마대의 이름을 따서 세마사로 개칭하였으나,
이는 사찰 내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말로 공식명칭은 보적사이다.
1986년 도광이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선실·요사채가 있으며,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 좌상 을 비롯하여 약사불상·지장보살상·십육나한상 등이 있다.
'보적사'라는 이름은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설에 따르면 춘궁기에 먹을 것이 쌀 한 되 밖에 되지 않던 노부부가,
이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를 부처의 은혜로 여긴 부부는 그 후로 더욱 열심히 공양하였고 여기에서 '보적사'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또한 이곳은 정조임금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 하였다가
환궁 하던중 장맛비 때문에 이곳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갔는데 여기서 백성들에게 몇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30년뒤 풍수지리의 문제로 독산성을 없에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지만 충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독산성을 더 고쳐 쌓도록 명하여 지금의 독산성의 모습이 갖추어 졌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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