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20. 08:22ㆍ자전적 소설[여우고개의 추억]
경기도 파주에서 1825일 기록 중
1985년에 쓴 일기장에서 [게시글 저작권 있음]
초평도를 바라보면서
내가 1986년 임진강을 떠나
남해안 거제도에서 오래도록 근무를 할 때
괴롭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갈곳도 (해금강)를 바라보면서
갈매기와 함께 파도를 타고
저멀리 망망대해로 달려나가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민통선을 하염없이 흐르는 임진강 그리고
분단의 역사와 함께 고립된 섬 초평도
임진강에서 가장 큰 섬 초평도는
임진강이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르면서
가운데에 모래와 흙을 쌓아 만들어 놓은 섬이다
문산리 여우고개를 지나 임진나루터 가는 길
고개 넘어 산 정상에 서면
초평도와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던 시절에
임진강 초평도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함경남도 미식령의 작은 섬에서 출발하여
오랜 세월동안 쌓이고 패인 임진강 하구 유일의 섬
초평도는 문산읍 장산리 건너에 위치한다
6.25전쟁 이전에는 논이었지만
휴전협상 이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다
긴장의 완충지대의 역할도 충분히 한 것이다
초평도가 민통선에 갇혀 무인도가 된 후
초평도는 장단반도와 함께
한때 박격포 훈련장으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갈대밭이 소실되기도 하였고
홍수와 함께 떠내려온 유실 지뢰와
불발탄이 있어 군인들도 접근이 금지 되었던 곳
70년 세월을 훌쩍 넘어 전쟁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섬 초평도
70년 동안 오염되지 않아 별천지처럼 보이는 곳
사람의 접근이 금지되 새와 동물의 지상낙원이 된 초평도
분단이 되면서 군사보호구역과 함께 무인도가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지고 무심한 세월만 흘러갔다
한때는 이 지역을 개발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북 통일이 되어도 초평도는 이대로 인간의 손길이 가지 않고
철새와 동물의 낙원으로 그냥 남기를 바라고 있다 .
나는 이곳 임진강에서 5년여 근무를 했던 과거를 떠올려
장단반도와 초평도 서쪽에 있는 수내나루와
그리고 임진나루를 배경으로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다
천혜의 습지인 초평도가 임진강 장단반도와 함께 이곳이
사유지인 것을 알고 큰 충격 받았다
그동안 초평도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얻기위해 노력하였으나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었다
행정구역상 파주시 군내면에 위치하고
모래 갯지를 포함하면 200만 평방미터 정도라고 하는것이
책자와 인터넷에 있는 정보이다
내가 이글을 쓰면서 다루는 내용이 초평도에 대한 자료의 전부이다.
초평도가
세상에 많이 알려져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자연 생태습지의 보고로 지정되길 바랄 뿐이다
초평도는 과거 임진강을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으며,
초평도의 서쪽에 있는 수내나루는 임진나루와 함께
조선시대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때 선조임금이 피난을 가기위해
임진강을 건너던 곳이 임진나루이다
국도 1호선은 임진각 자유의 다리를 건너 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 임진나루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향한다
1985년 10월 중순
임진강에 가을은 왔지만
차가운 강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른 아침 임진강을 바라보니
민통선(민간인통제구역)의 가을걷이를 위해
출입을 허가받고 경운기를 실은 임진리 사람들의
나룻배가 강을 가로질러 동파리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레이다 장비를 견인해서 시험장으로 이동을 하였다
운천리 장단반도 부근에서 1호기 레이다를 세팅을 하고 장비 가동에 들어갔다
장비 시험을 마칠 무렵에 태양은 장단반도 서쪽으로 기울어
임진강 강물 위로 붉은 햇사래를 비추고 있었는데
파견대 본부로 복귀를 하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장파리로 장비 시헝을 떠났던 2호기 레이다는 아직 복귀를 못하고 있었다
장비를 602차량에서 분리하여 벙커에 안착시키고 있는데
위병소에서 "근무 중 이상무" 외침과 함께
바리케이드가 움직이고 철제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 근교에 있는 본부대에서 회의를 마치고 파견대장이 복귀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 인상이 찌그러져 있었다
내가 다가서면서 거수경례를 붙였는데 고개만 끄떡이면서 하는말이
"짐 싸야 될 거 같아"
"장비 추가 도입이 보류되었데"
파견대장이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하고 있었다
상급부대에서 장비의 현지 적응 시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 4년 동안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막사 앞에 나와 있던 병사들도 말을 잊고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눈보라 치던 날 상무대(포병학교) 교육장에서 시작하여 전방 파주지역까지 올라와서
대장정을 소화하면서 장비 테스트를 하여 왔는데
아무런 보람도 없이 이대로 끝이 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앞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또 다른 보직을 받고 흩어져야 하는지
첫돌이 막 지난 딸내미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선임하사님 전화 왔습니다"
조그만 통신실 창문을 통해 교환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부에 머무르고 있는 있는 레이다 장비 정비팀의
김준위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나의 군대 친구 중 동기생 준호와 함께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던 소중했던 전우였다
충청도 태안반도가 고향이었다
외국에서 도입된 레이다 장비의 한국 적응시험 요원으로 만났다
나는 운용팀에서 그 친구는 장비 정비팀으로 해서
포병학교에서 시작을 하여
전방 파주지역까지 현지 적응 시험까지 오랜 기간을 동고 동락을 했다
결혼전 상무대 근무시 상무동에서 함께 영외거주를 하면서 많은 추억을 만들기도 했었다 .
그시절 그의 고향집 충청도 태안반도에서 하룻밤 묵은 일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유도 체육관을 운영한 적이 있었고 모친은
청과물 도매상을 하고 있었는다 그 친구에게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여동생과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한 번이라도 해후를 하고 가야할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의정부에서 있었던 대형 안전사고에 연류가 되어 전역을 하고 말았다
나보다 나이는 두 살 위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하사 임용을 했고 외국으로 군사유학을
다녀와서 나보다 준위 임관은 먼저 했다
그 사고 때문에 그의 개인의 명예도 잃어버리고
군에서도 아까운 인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1986년 내가 3사관 학교를 수료하고 준위 임관 후 거제도에 내려간후
몇달이 지나가고 안정이 된 후 이 친구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였으나 연락이 닿지 못했다
내가 당시에 전우신문 (지금의 국방일보)과
군에 많이 보급이 된 '샘터'라는 책자에 '전우를 찿습니다' 라는 기고를 낸 적도 있었다
내 블로그를 통해 사연이 전달되길 바랄 뿐이다
이미 그 친구는 나의 위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친구도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 되기 전
초장기 도스 운영체제에 능통했었으니까
내가 초창기 포털 '야후(Yahoo)'에서 부터
지금까지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써 왔고
주요 포털에 검색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친구 실명도 자주 언급을 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 뿐만 아니라 나의 임관 막바지 피교육생 시절
다리에 관절염이 와서 나를 업고 교육장으로 이동을 시켰던
전우들의 이름도 언급을 했었지만
-- 이어지는 글
[참고자료]
MDL(군사분계선)과 DMZ(비무장지대)
군사 ( Military)
경계선 (Demarcation )
Line
비 (Dis),
무장 (Militerised),
지대 (Zone)
비무장 지대는
휴전후 MDL을 중심으로 남북 각 2km 지역(총 4km)을
쌍방 충돌을 막기위해 유엔에서 정해놓은 것이다
비무장지대(DMZ)의 남쪽 경계가 SLL(남방한계선)
북쪽 경계가 NLL(북방한계선)이다.
군사활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적과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가장 살벌한 대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양측 다 철조망 등의 장벽을 세우고 서로에 대해서 철저하게 감시활동과 첩보전을 벌이거나
대북방송, 대남방송을 펼치는 장소이며 무력충돌도 발생하는 곳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군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양측의 총격을 목격한 사람도 있다
비무장지대 안에는 병력 배치가 금지되어 있지만
사실 GP라는 군사기지가 존재한다.
GP에 배치된 병력은 명목상으로는 전투병력이 아니지만
명목상으로만 그럴 뿐 그냥 군인들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휴전선이라는 곳에 철조망 하나 치고
그것을 경계로 남쪽엔 한국군이, 북쪽엔 북한군이 있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론 행정상의 구분선이 있고
그 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서
각각의 경계선을 쳐놓고 있어서
그 두개의 경계선 사이에 빈 공간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DMZ이다.
판문점의 경계선은 유엔이 만들어 놓은 틀별한 경우이다
남방한계선 아래로는 민간인 출입통제선인
통칭 민통선이 설정되어 있어서 민간인은 가까이 갈 수도 없다.
남방한계선 안으로 더 들어가기 위해서는 UN군사령부에서 발급한 통행증이 필요하다.
들어가면 70여년 동안 사람 때를 타지 않은 자연 환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지대가 조성된 제일 중요한 이유는
DMZ 대부분이 미확인 지뢰지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지뢰 수가 가장 많은 지역.
이 지역에 제일 많은 지뢰는 M16 도약식 대인지뢰라고 하며,
대전차지뢰나 M14 발목지뢰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면 사망 확률이 높다
물론 길도 위험하긴 하다.
길 지하에 대전차 지뢰가 묻혀 있다든가.
그래서 종종 여기 살던 고라니등 야생동물이 지뢰를 건드려
지뢰 터지는 소리가 나곤 하였다
원래 판문점 인근의 JSA 구역을 제외하고
국제법상으로는 한국측은 대한민국 경찰이
북한측은 인민보안부 소속 보안원(경찰)이 경계를 해야하고
군 병력이 상주할 수 없는것이 규칙이나
지역이 지역인 만큼 남북 양측에서 '민사행정경찰'
명칭은 민정경찰(남한), 민경부대(북한)라는 사람들을 GP에 배치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말이 민사행정경찰이지 사실상 군 병력이다.
사실 휴전 이후로 1970년대까지 자주
DMZ에서 양측 병력간 총격전이 벌어져 연간 서로 많은 사상자가 나오곤 했다.
분단의 아픔이 존재하는 DMZ 에
한국에서 제일 위험한 마을이라고 불리는 대성동이 여기 위치해 있다.
또한 철도역인 경의선과 평부선 그리고 장단역이 있다.
금강산 가는열차 금강산선의 구간 상당수가 이 DMZ를 따라 달린다.
또한 이 구역의 일부 지역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강에 초평도라는 섬이 위치해 있다.
휴전후 완충지 역할을 하는 초평도를 무인도로 만들었다.
-- 청솔 아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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