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4. 06:45ㆍ자전적 소설[여우고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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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에서 1825일 기록 중
1981년에 쓴 일기장에서
1981년 경기도 문산읍 운천리
통일로를 따라가다 보면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이 나온다.
문산교에서 임진각 자유의 다리 방향을 바라다보면
좌측 도로 옆에 여인들이 몸을 파는 집창촌이 있었다.
당시에는 열차가 문산역까지만 도달하였지만
수송 보급 열차는 집창촌 앞까지 운행 되고 있었다 .
북쪽으로 올라가는 사실상 마지막 철길의 종착지였다.
집창촌을 좌측으로 하고 통일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운천리 가기 바로 전에 우측으로 임진강 나루터 가는 길이 있다.
그 삼거리 얕은 언덕 고갯길이 여우고개이다 .
여우의 굽은 등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곳인데
예전부터 여우고개는 사연 많은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적성 쪽으로가는 4차선 도로가 여우고개를 관통을 하다시피해서
예전의 여우고개 모습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지명은 그대로 있다.
그 여우고개를 지나면 우측으로 운천리 대덕골 마을이 나오는데
얕은 산 아래 나란히 선 집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딸 부잣집이 있었다
문산 땅으로 전입을 간 후에 부대에서 두 어달 영내거주를 하다가
부대 적응 생활이 끝나고 영외거주를 하게 되는데 부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덕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집에 이사를 가지 전에는 딸이 다섯이나 있는 줄은 몰랐다
임진강나룻터에서 운천리로 나오는길은 폭이좁은 험한 길이였다.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날리며 군용트럭이 이삿짐을 실은채
운천리 대덕골 마을 밖에서보면 두번째로보이는 주택에 도착했다.
이삿짐이라곤 TV와 카시미론 이불한채,쓰래기통, 세숫대야,
그리고 낡은 통기타가 전부였지만
디젤 군용차 굉음과 마을 전채를 뒤덮은 먼지가 요란 하였다.
운천리 대덕골에 지어진 집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형태로 지어졌는데
통일로가 뚤리고 임진각이 건축 되고해서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또 남북적십자 회담등이 열리고 있어서 미관상 보기가 안좋은
옛 농가주택들은 모두 철거하고 정부지원을 받아
짧은기간내 일률적으로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였다.
내가 이사를 온 그집에는 아들하나에 딸이 다섯인 집이였다.
내가 의도를 하고 그집에 이사를 간것은 아니였다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지만
내가 소심한 성격이라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다.
큰딸은 서른이 가까운 노처녀 였으며 아래 여동생 모두 미혼 이였다.
첫째딸과 둘째딸은 서울에서 거주를 하며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나머지 동생들은 집에서 직장과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나는 세째딸을 좋아 했는데
나를 좋아한것은 말광양이에 약간 푼수끼가 있는 18살 정도 되어보이는 넷째딸이 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군용트럭을 복귀시키고 이삿짐을 풀고 있는데
''아저씨 부인은 같이 안오세요? ''.
이제 23세살 나이인 나에게 넷째딸이 손가락을 입에 물고 희한한 표정으로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군복에 중사계급장을 달고 있는 내보습이 그집 넷째딸에게는
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는 모양이였다.
'' 군인한테 시집올 여자가 없어서 아직 장가를 못갔네요 '' .
내가 웃으면서 그렇게 답을 했다.
대덕골 마을
운천리 대덕골 마을에 방 한 칸을 얻어 이사를 온 지도 두 달 여가 되어 가지만
내가 전입해온 부대가 새터를 마련한지라 무척이나 바쁜 날의 연속이었다 .
밤늦게 퇴근을 하면 곧바로 골아 떨어져 자고는 아침 일찍 출근을 하기에 바빴다
내가 이사를 온 집은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집이었는데
집 뒤편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인집 거실과 마주하고 있는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또 하나의 군인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인근 보병부대에 근무하고 있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가진 30대의 부사관 가족이었다.
두 부부가 다른 군인가족과는 다르게 심성이 고운 사람들 이였다.
1986년 내가 영천 3사관 학교에서 준위 임관 교육 중에 있을 때 면회를 오기도 하였다.
그 사람은 6개월 주기로 임진강 너머에 있는 최전방 GOP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
집에는 한 달에 몇 번씩 외박을 나오면서 가족과 만나는데
그 당시 아빠가 강 건너 GOP 근무를 하기 위해 떠나는 날이면
그 집 딸애가 아빠를 붙잡고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 아주머니는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말씀을 차분히 하는 마음씨가 고운 아주머니였으며
바깥양반은 키가 큰 장골형이었다.
그 집은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둔 집안이었는데 내가 이사를 온 후
두 달 동안은 그집 가족의 얼굴을 잘 볼 수가 없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다가오면서 방문을 열어놓고 지내면서부터는
그 집 가족들의 얼굴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
"첫사랑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첫사랑의 추억을 말할 때 이렇게 말 들하곤 한다 .
저마다 첫사랑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도 다르게 말을 하는데
상대방의 생각은 무시를 한채 일방적인 짝사랑이 대부분이라 생각된다.
유년시절에는 그것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대부분 학창시절에 첫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내가 하늘 아래 첫 동네 남각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그 당시 산골마을 스물다섯 가구 중에 그해 무술년에 태어난 개띠들이 15명이나 있었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전국에서 흩어져 환갑을 맞았다
지금은 수도권에서는 나와 고향마을 여자친구 두 사람이 살고 있다
그 여자 친구는 어릴 적 동네 앞뒷집 이웃하면서 살았었다
그 당시 아주 어릴 적에는 남자 여자아이 구분 없이 아랫도리를 내어 놓고 자랐다
"자야! 옛날에 니가 내 꼬치 잡아 땡겼제?"
지금도 서울에서 초등학교 동창회서 만나기만 하면 내가 하는 말이다
"어머 야야, 내가 언제 잡아 땡겼노? 신기해서 만져봣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을 한다
또 다른 초등학교 여자 동창 중에서 가을운동회
연습 중 "산골짝의 다람쥐"란 음악에 맞춰 율동 춤을 추는데
그때 두 손을 마주 잡고 함께 춤을 추었던
짝꿍의 얼굴이 불혹의 나이가 지난 후에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나고 초등학교 동창회서 만났는데
나에게는 쌀쌀한 모습으로 대하는 그 친구에 실망하면서부터는
나의 추억과 기억 속에 있던 사람의 얼굴 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좋아했던 여인을 그려보면 다른 남학생 친구도 그 여자를
짝사랑하는 속에서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을 뿐이였다고 생각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남녀공학 이었는데 고3때의 같은 반 여학생을 남몰래 짝사랑했던 기억이 난다.
키가 작고 눈이 고운 여인의 모습으로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오랜동안 기억속에 남아 있는데
명절이 다가오고 고향생각이 날무렵에 아침 세수를하고 거울 앞에서면
교복을 입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클로즈업되어 나타나곤 하였다 .
첫사랑의 애증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잊혀지지않는 사람,그 묘한 감정으로 오랜동안 남아 있는것이다.
대덕골 마을
임진강 나루터 가는길
지금은 도로가 생겨 없어진 여우고개 작은 언덕위에는
북쪽으로 포신을 향한 탱크가 위장망을 뒤집어 쓴채 숨어 있었으며
여우고개 넘어 대덕골 마을에 내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집주인의 논밭이 있었다.
그 논에는 몇년후 미군부대가 들어섰다
그집 땅이 수용될무렵 주인 아저씨가 걱정을 많이 하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지금은 미군부대도 없어지고 4차선 길이 통과를 하고 있지만
당시에 여우고개 넘어 대덕골 마을앞을 지나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이 실개천에서 주말이 되면 집주인 셋째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집으로 이사를 온후
셋째딸 얼굴을 자세히 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청순 가련하게만 느껴지는 그모습에 내가그만 한눈에 반해 버렸다 .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이란 애정의 감정이 내가슴에 들어온것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번 사랑이란 감정이 남자의 몸에 박혀버리면 물불을 못가리는 남자의 심정을 이해할수가 있었다.
"아저씨 내가 방청소 해줄까요?."
주인집 셋째딸의 목소리처럼 들려서 방문을 열어보니
그집 넷째딸이 방바닥에 깔리는 긴치마를 입은채 내게 말을 건낸다
나는 그집 세쨋딸을 좋아하는데 넷째딸이 언제나 방해를 놓는다.
"내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내가 해야되요 "
내가 그렇게 반대의 말을 했다.
"미구같다"는 옛 말이있다 좀 일이 진척이 되어갈만 하면 꼭 나타나서
훼방을 놓고 가는데 두서너살 정도 나이가 많은 언니는 언제나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서
바로 아래 여동생에게 항상 지면서 살고 있었다.
내가 퇴근을 하는 날이면 넷째딸이 항상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어른이된 모습은 언니보다 키도 크고 얼굴도 언니만큼이나 이쁜 모습 이던데
그 당시에는 왜그리 미웁게만 보이던지
내 나이를 알고부터는 일부러 장난삼아 그러는것 같기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퇴근할때 넷째딸이 보이면 집에 들어가지않고 숨어 있다가
셋째딸이 보이면 집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때도 어김없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선다.
사람이 여자나 남자나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그사람이 아무리 고운 감정을 가지고 다가서도 심리상 절대 호감이 가지 않는다 .
한번은 어두컴컴한 저녘길에 퇴근을 하는데 평상시의 언니의 옷을입고 화장을 짖게 하고
현관앞에 서 있었다 나는 셋째딸 인줄알고 두근거리는 마음 진정을 하지를 못하고
안그래도 어눌한 경상도 북부 토박이 사투리에 더듬거리면서 몇마디 말을 건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손가락을 입에 물고 웃는 모습에
그때서야 셋째딸 인줄을 알아채고 기겁을 한일도 있다 .
그런일도 있고 해서 어느날은 퇴근을 할때 시커먼 미제 군용 쌍안경을 가지고 나가
멀리서 네쨋딸 동태를 살피기도 했고 취사반에 있던 밀가루를 한웅큼 들고 나갔는데
넷째딸 얼굴에 뿌릴까도 생각을 했었다.
함께 퇴근을 하는날에 나의 이런 괴상한 행동을 하는것을 보고있던
나보다 나이가 20년이나 많은 나의 상관 파견대장은
"그래가지고서야 어디 여자를 사귀고 장가를 갈수 있겠나.?" 고
혀를 차면서 하던 말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
그 후에도 여우고개에서 맺은 인연 그 대덕골 첫사랑과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82년 늦은 가을날
1982년 11월 7일 일요일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경기도 파주에서 11월이면 날씨가 추웠는데 그날따라 포근해서 늦가을 비가 주적주적 내리고 있었다
그 전날 외박을 나가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고 늦은 저녁에 대덕골 집으로 오니 방안이 냉기가 가득해서
옆방에 세들어 사는 군인가족에게 반쯤탄 연탄불을 얻어와서 부억에서 갈아넣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내가 문산병원에서 정신이 돌아오기 까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
계속 (수정중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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