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경의선 열차를 함께 타고 온 또 다른 묘령의 셋째 딸

2018. 3. 15. 22:17자전적 소설[여우고개의 추억]

경기도 파주에서 1825일 기록 중

1983년에 쓴 일기장에서 



경기도 문산에서 맞선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 안동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하는 아버지를  맞이하러

나는 문산역에서 출발하는 경의선 열차를 탔다
한 시간 남짓 걸려 서부역에 도착하는 파란색의 경의선 열차
당시 문산 가는 경의선 열차를 타려면 서울역에서 내려서 서부역 탑승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지금은 경의선이 전철화되어서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경의선 전철을 타고 파주까지 가는 길이 쉽지만
그때는 서울역에서 내려서 경의선 열차를 환승하기 위해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뛰어가는 열차 승객들 모습이 생각이 난다
막상 열차에 올라도 언제나 열차 안은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당시 경기북부권 중 일산이나 고양, 금촌, 봉일천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주로 파란색의 경의선 열차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고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중앙선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한 승객은 경의선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청량리역에서 서울역까지 먼 거리를 이동을 해 와야 한다
용산역에 도착하는 장항선 열차나 호남선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도 그랬었다
당시 경의선 열차는 지금처럼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에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고향을 가기 길에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열차를 환승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1980년대 초 파주에서 근무를 할 때 임진나루터에서 여우 고개 넘어오는 군작전 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걸어 나와서
 하루에 몇 번 다니지도 않는 시골 버스를 기다려 타고 문산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문산역까지 이동을 해서 기차를 타야 한다
그래도 통제를 벗어나 고향 가는 홀가분한 마음에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은 오히려 행복한 피로였다
그렇게 열몇 시간을 넘게 걸려 가난한 고향마을에 도착을 해서도 바쁜 농촌일에 편하게 쉬어갈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힘들었던 청춘시절인 그 당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




"선생님 인상이 너무 좋으십니다 "
청량리역에서 부친을 기다리기 위해 대합실에서 서성대고 있는데
가슴골이 보이는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얇은 책 한 권을 건네주면서 하는 말이다
내가 그 책을 건네받고 어떤 내용의 책인지 훑어볼 여유도 주질 않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애교 섞인 음성으로 계속 뭐라고 지껄이면서 말을 이어간다
"훗날 아주 크게 되실 분이십니다 "
청량리역 대합실에 많은 사람들 중에 나에게 다가 온 이유가 궁금하였다 .
훗날 생각을 해보니
내가 검게 탄 얼굴에 짧은 머리를 하고 군복 대신 사복을 입고
당시 채권 장수들이나 들고 다니는 검은 007가방을 들고 있으니
표적이 되었는 것 같았다 .
그렇게 전단지 책자 한 권에 1983년 당시 5천 원이라는 거금을 정신없이 갈취를 당했다.
훗날 휴가 때 고향을 가기 위해 청량리역에 가면
그 여자 패거리들이 어김없이 다가오곤 했는데 귀싸대기를 올려주고 싶지만 참았던 기억이 있다.


 
오전 안동역을 출발한 비둘기호 열차는 그날 오후 청량리역에 20여 분 연착을 하고 도착을 하였다
반갑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아버지를 끌다시피 하여
서부역에서 출발하여 문산 가는 경의선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렀다

오후 늦게 경의선 열차가 경기도 파주 문산역에 도착하였다
서부역을 출발한 경의선 열차는 운정역, 백마역, 금촌역, 파주역 등에서 승객들을 차례로 토해내고
맨 마지막 역인 문산역에 도착을 하였을 때는 열차 승객들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와 문산역 역사를 나오는데 뒤에서 따라 나오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어디서 본듯한 안면이 있는 여자였다
그 여자도 나를 몇 번이고 다시 쳐다보면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총각시절을 보낼 때
내가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분이 그 당시 나의 직속상관이었다
스님이 자기 머리를 자르기 어렵듯이 막상 장가를 들려면 당시에도 쉽지는 않았다
더구나 전방에 근무하는 직업군인 신분으로 장가를 가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잘 알고 있는 직속상관이 다리를 놓아줄 결정을 한 것 같았다
당시 1980년 초 경기도 문산역 인근에 주공아파트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아파트는 없어지고 운동장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문산에서 유일한 아파트 단지였다
나의 직속상관이 그 아파트를 관사처럼 사용을 하고 있었고
같은 아파트에 지금의 나의 처형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셋째 딸이었던 막내 여동생을 나에게 소개했었다
훗날 내가 준위 임관 후 거제도에서 근무를 하면서 나와 함께 근무를 했던 부하를 내가 중매를 서줬던 것처럼 그러했다
그리고 중매를 서 줬던 당시 직속상관은 지금은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데 연세가 팔순이 넘었다
그 당시  양복 한벌도 선물을 못해 드렸는데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당시 내가 알고 지내는 여자들이 몇 있었다
그 당시 진정 마음에 두었던 두 여자가 있었고 결혼까지 생각을 했던 여자도 있었지만
운천리 셋째 딸은 내가 졸지에 그 집에서 연탄가스를 맞고 죽을 뻔하였는데
결국 그 집을 나오면서 셋째 딸과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쁜 얼굴을 하고 순진하게만 보였던 파주 법원리에 사는 여자를 사귀면서 나름대로 투자도 많이 하였다
당시 문산에서 법원리를 오가던 버스 안내 양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젊은 장교, 부사관을 비롯해서
직업 군인 총각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학업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시집을 가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기도 했지만
어느 날 미군 백인과 사귄다는 소문이 있기에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본 결과 사실인 것 같아서
그동안 투자했던 본전이 아쉬웠지만 깨끗이 정리를 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시 문산읍사무소 근처 2층  약속다방에는
아버지와 내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맛선을 보기로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가입시더 고마"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나갈려고 하는데

"이왕 먼 길 왔는데 조금만 기다려보자 "
잠시후에 지금의 처형과 조금 전 경의선을 함께 타고 문산역에서 내린 그 여자가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그날 맛선 후 그 다방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가 내게 하는 말이 있었다.
"언니가 훨씬 더 났따"
훗날 처음으로 처갓집에 가서  내가 술에 취해 이말을 했다고 지금도  나를 윽박지로 있다.


중략,이어지는 글